▲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호아킨 피닉스에게 남우주연상을, 린 램지 감독에게 각본상을 각각 안겨준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팝콘필름과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대사 한 마디, 상황적 디테일 등에서 감독과 두뇌 싸움을 벌이거나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지적 유희를 즐기고 싶다면 안성맞춤이다.

신시내티에서 노모와 함께 사는 중년의 조(호아킨 피닉스)는 유명인사들의 은밀한 뒷일을 처리해주는 청부 범죄자다. 중개업자 존이 미성년자 성매매 업자들에게 납치된 보토 상원 의원의 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구해달라는 일을 맡기고 조는 무사히 구출해 약속한 호텔에서 기다린다.

남은 시간 TV를 시청하던 조와 니나는 보토가 투신자살했다는 속보를 접하고 경악한다. 그리고 갑자기 무장한 경찰 2명이 들이닥쳐 1명은 조를 제압하고, 나머지는 니나를 납치해간다. 잠시 후 경찰이 방심한 틈을 노려 제압한 조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존과 엄마를 찾지만 이미 살해당했는데.

예술영화는 익숙한 형식적 시각에서 보면 불편하다. 그래서 흥행과는 항상 거리를 둔다. 그럼에도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자본은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거나 희석하기 위해 계속 예술에 투자하기 마련이라는 아이러니. 그러나 이 정도로 예술적이라면 자본의 위장술은 정당화될 수 있다.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 이미지

대사를 최대한 줄인 절제로써 조의 심리상태에 빠져 들어가게 만드는 연출 솜씨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물론 피닉스라는 배우가 있었기에 완성이 가능했다. 어릴 적 조의 아버지는 망치를 휘두를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여기에 전쟁에서 겪은 고통까지 더해져 그의 트라우마는 더욱 큰 괴물을 키웠다.

어릴 때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소음을 피하기 위해 비닐봉지를 뒤집어썼던 비정상적 행동은 현재진행형이고, 그것도 모자라 칼을 입속에 넣거나 수시로 플랫폼에 서서 투신의 유혹과 싸운다. 가방도 없이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고 다니고 꽁지머리를 하는 건 세상과, 타인과의 단절이다. 자아의 유폐다.

거리의 소음은 엄청난 데시벨로 그를 교란함으로써 정신을 뫼비우스의 띠 안에 감금하고, 느닷없는 폭력을 단숨에 제압한 그는 보복도 하지 않고 일상처럼 그냥 가던 길을 간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 다를 뿐 조와 엄마의 생활은 수십 년 전에 정체돼 있다. 엄마는 조의 오래전 연인의 안부를 물을 정도.

조가 냉장고 안에서 1972년산 치즈가 썩어 문드러져가고 있다지만 버리지 말라는 엄마는 “무섭다”면서도 TV에서 ‘사이코’를 보고, 이에 조는 칼로 영화의 한 장면을 흉내 낸다. 조는 무시로 꿈과 환상으로 해변에 누워 반복해서 발로 모래를 파는 존재를 본다. 무의미하고 무기력함의 쳇바퀴다.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 이미지

그는 조의 현존재일 수도, 본디적 존재일 수도, 니나일 수도 있다. 10대 중반의 니나는 엄마를 여읜 뒤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고위 권력층인 아버지의 주변엔 부패가 서성일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조는 한눈에 니나에게서 자아를 봤다. 목숨 걸고 그녀를 지키는 이유다.

수시로 자살을 꿈꿨던 그에게 엄마의 죽음은 결정적인 핑계거리다. 처음으로 정장을 입은 그는 호수에 엄마를 수장시키며 자신도 심연으로 빠져 들어간다. 하지만 내면의 눈으로 썩어빠진 권력에 희생된 니나의 몸부림을 목도하고 주머니 속의 돌을 빼내 물 밖으로 나온다. 재탄생 혹은 환생이다.

비탄과 초월, 과격과 허무 등을 오가며 줄타기하던 그는 그 후 본디적 존재를 찾는다. 후반 엄청난 광경 앞에서 놀라 급하게 셔츠를 벗어젖히며 “난 나약해”라며 우는 데서 알 수 있다. 절제된 대사의 공백은 엄청난 음악이 대신 채운다. 특히 기타, 비올라, 첼로, 바이올린 등 현악기들의 협연은 놀랍다.

기타는 저음의 5~6번 줄 위주의 타현으로 긴장감을 배가시키고, 현악기들은 마치 테크노 팝 같은 기능을 하는가 하면 활이 아닌 손가락의 타법으로 연주돼 주술적 효과를 증폭시킨다. 샬린의 ‘I've never been to me’의 ‘낙원에는 가봤지만 나에게는 가본 적이 없어’라는 존재론적 가사는 절묘하다.

▲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스틸 이미지

조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괴한을 총으로 쓰러뜨린 뒤 죽어가는 그의 옆에 함께 누워 이 노래를 부른다. 그리곤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준다. 조와 엄마는 알파벳으로 단어를 만드는 놀이를 하고, 니나는 홀로 숫자를 거꾸로 센다. 샬린의 노래가 삽입된 것과 같은 존재론적 맥락이다.

감독은 부활한 조는 나사로에서 빌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니나는 영혼이 산산조각 난 탓에 살아도 산 게 아니고, 죽어도 제대로 안식할 수 없었던 조의 구원자일까? 끝부분의 조와 니나의 “우리 어디로 가요?” “네가 원하는 곳으로. 그게 어디야?” “몰라요” “나도 모르겠다”라는 대화는 해탈과 철학이다.

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피가 주는 긴장감이 충만하지만 상투적인 자극으로 상업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과욕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노출을 최소화하고, 액션의 화려함을 절제함으로써 예술적인 경지로 끌어올렸다. 로우지의 부드러운 로큰롤 블루스 ‘Angel baby’ 덕에 액션 시퀀스는 몽환적이다.

조와 니나의 조합은 불교철학의 모든 현상의 생기소멸의 법칙인 연기론을 말한다. 15살의 러시아계 모델 겸 배우인 삼소노프는 피닉스의 존재감에 절대 주눅 들지 않은 존재상적(논리적, 과학적) 존재를 보여준다. ‘택시 드라이버’보다는 밝고, ‘레옹’보다는 심오하다. 89분. 15살 이상. 10월 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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