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비명령’ 북의 도끼만행을 보복하라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8.09.28l수정2018.10.1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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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극비명령’ 북의 도끼만행을 보복하라

3공화국 당시 크고 작은 많은 사건들이 생겨났지만 이 가운데 1976년 8월18일 북한군이 저지른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은 남북간 가장 위급한 상황으로 치달아 일촉즉발의 위기가 조성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건으로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됐으니 말이다. 보복작전은 미8군과 한국군 1공수여단이 합세했다. 당시 1공수여단장은 박희도 장군이었다. 그는 부대장으로 부임한 지 알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복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박 장군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들여다본다.

그해 8월18일 그러니까 도끼만행사건이 있던 날 저녁 박 장군은 유병현(柳炳賢)합참본부장으로부터 긴급 호출명령을 받았다. 3성장군이 중간 지휘관을 거치지 않고 직접 특전단장을 부르기는 이례적이었다.

“박 장군, 아주 비밀스러운 명령을 이행해주시오. 한 50~60명정도면 될 것 같은데 도끼만행사건에 대한 보복작전을 은밀히 진행중이오. 선발된 인원은 특별히 무성무기 훈련을 잘 시켜야 합니다. 다음 명령이 또 있을거요. 이 얘기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됩니다.”

극비명령을 수령한 박 장군은 부대로 돌아왔으나 커다란 고민에 휩싸였다. 판문점에 직접 들어가 작전을 수행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누구를 선발할 것이며 특공대장은 누구로 할 것인지 선뜻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특히 그는 부임한 지 두 달밖에 안돼 부대원들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고민 끝에 박 장군은 작전참모 박중환 중령과 그의 보좌관 김종헌 소령을 자신의 방으로 조용히 불렀다.

“사실은 극비 보안을 유지하는 사항이다. 나는 부대에 온 지 얼마 안돼 내가 직접 나서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해 달라. 각 대대에서 정예요원 60명 정도를 선발하라. 그 기준은 체력과 담력이 뛰어나야 하고 기혼자나 독자, 장남은 선발기준에서 제외돼야 한다.”

그로부터 약 2시간 뒤 작전참모가 결과보고를 하겠다며 박 장군의 방으로 들어왔다. 장교 9명, 사병 54명을 포함, 모두 63명을 선발하여 체육관에 집결시켰다는 것이었다. 박 장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선발된 인원들은 외부와 연락을 일체 할 수 없도록 주의를 주고 체육관 주변에는 경비병을 두어 감시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원들에게는 멋있는 특공작전을 펼쳐질 것이라는 정도만 귀띔해주라고 말했다. 사실 박 장군 역시 정확한 작전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판문점에 결사대를 투입하는 것과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다음 고민은 결사대장 선발이었는데 작전참모한테 적임자를 물색해보라고 지시했다. 이런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종헌 소령이 “단장님 제가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나섰다. 박 장군은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정말 전임 지휘관(전두환 장군)이 부대를 잘 관리했구나. 결사대 조직에 서로 나서겠다고 하니 말야.’ 박 장군은 김 소령에게 아직 미혼인지 물었고 김 소령은 그렇다고 대답했다(사실은 기혼이었으나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며 나중에 김 소령의 부인이 이러한 사실을 알고는 실신했다). 이렇게 해서 특공요원을 모두 선발하고 훈련에 돌입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공수단 요원들에게 박 대통령 하사금 50만원

그렇게 훈련 중이던 이튿날 저녁 육군 수뇌부들이 극비리에 박 장군의 부대를 방문했다. 노재현 합참의장, 이세호 참모총장 등이 지프의 별판을 가리고 부대 위병소를 통과한 후 박 장군의 방에 도착했다. 이들은 박 장군을 만나자마자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지요?”라며 판문점에서 이행할 2차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면서 “이거 각하께서 특별히 하사한 것이오.”라며 두툼한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현금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박 장군은 순간 박 대통령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 이 작전은 각하의 지시이며 각하의 자존심이 걸려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장군은 명령대로 20일 아침 64명의 결사대 요원을 미2사단에 배속시키는 작업과 함께 작전참모 박 중령과 결사대장 김 소령, 그리고 영어회화에 능통한 작전장교 김 대위에게 헬기편으로 미2사단 지역에 나가 있는 스틸웰 미8군 사령관을 만나 작전명령을 수령하라고 했다. 당시 스틸웰 사령관은 판문점에 있는 미루나무 절단작전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판문점 근처의 키티호크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미2사단 기갑대대장인 비에라 중령 방에서 스틸웰 사령관을 만나 다음과 같은 명령을 하달받았다.

1. 미군이 미루나무를 절단할 때 그 주위를 한국군이 경호한다.
2. 무기의 휴대는 규정에 따라 일체 금한다.
3. 지금부터 한국군은 작전부대장인 미군 중령 비에라의 지휘를 받는다.

“여차하면 선제공격하라”

이같은 내용은 즉각 박 장군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박 장군은 미루나무 주변 북한군 초소에는 무장병력들이 있으며 결국 한국군의 역할은 미군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라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명령내용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자 스틸웰 사령관은 이미 박 대통령과 양해가 된 사항이며 정 그렇다면 몽둥이는 휴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무장병력의 공동경비구역 진입은 휴전협정 위반사항이다).

박 장군은 19일 저녁 이세호 총장에 들은 말이 생각났다. ‘만약 북한군 초소병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면 철저히 응징하라.’ ‘여차하면 선제공격으로 쓰러뜨려도 좋다. 그 숫자에 따라 훈장을 줄 것이다.’

박 장군은 결사대장 김 소령을 불러 요원들을 무장하도록 시켰다. 아무리 무술로 단련된 요원들이지만 총알보다 빠를 수 없기 때문에 부하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결국 결사대 요원들은 가슴에 성능좋은 권총을 숨겼고 겨드랑이 밑에는 소형 수류탄을 감췄다. 그리고 표시가 안나도록 약간 큰 옷을 입었다. 겉으로 봤을 땐 감쪽같은 비무장차림이었다. 그러나 박 장군은 미심쩍은데가 있어 샌드백 속에 M16소총을 분리해 넣을 것을 지시했다. 비무장은 커녕 완벽한 중무장이었다.

박 장군은 판문점으로 떠나기에 앞서 “죽을 각오로 작전에 임하면 반드시 산다. 대통령 각하에 대한 체면과 우리나라의 자존심이 여러분한테 달려 있다. 살아서 돌아올 생각은 아예 하지 마라”는 말로 마지막 각오를 환기시켰다.

▲ 사진=ktv 화면 캡처

50분만에 끝난 잊지 못할 ‘그날’

드디어 작전개시 시각인 21일 아침 7시가 다가왔다. 박 장군을 비롯한 결사대 64명이 키티호크캠프에 도착한 것은 이보다 2시간 앞선 아침 5시였다. 6시경 인근에 있는 1사단장 우종림(禹鍾淋)장군이 캠프를 둘러보고 갔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1사단 수색대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좌측에 매복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6시30분경 비에라 중령은 당직장교를 통해 북한측에 메시지를 보냈다. 정각 7시가 되자 작전개시의 신호가 떨어졌다. 모두들 긴장된 순간이었다. 결사대 요원들도 비장한 각오로 미공병대원들과 함께 트럭에 탑승,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 안쪽도로에 차단기를 설치해놓아 접근이 어렵게 되자 한국의 결사대 요원들이 뛰어내려 단숨에 제거해 통과했다.

차단기 옆에는 북한군 초소막사가 보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결사대요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초소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두 살기가 등등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북한군 초병들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쪽으로 줄행랑을 쳤다. 결국 한국과 미군의 위세에 눌린 북한군은 멀리 떨어져 사진만 찍을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있던 문제의 미루나무는 절단됐고 50분만에 모든 작전은 완료됐다. 박 장군의 회고.

“당시 저는 전쟁을 치른다는 각오로 부하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시켰습니다. 무장헬기에다 B52폭격기 등이 판문점 상공에 엄호출격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요원들이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작전 중에 우리 요원과미군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이때 한 미군병사가 말리는 과정에서 옷속에 숨긴 권총을 발견했지요.”

이렇게 해서 당초의 규정을 어기고 무장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스틸웰 사령관은 규칙위반이라며 강력히 항의해왔다. 심지어는 박 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은 해고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박 장군은 “무슨 소리냐, 북한군한테 잡히면 자살하라고 무기를 준 것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다.”고 응수했다. 할 수 없이 한국군 당국은 유엔군사령관의 공식 요청으로 인해 1공수여단에 대해 특별감찰을 벌였고 결국 결사대장이었던 김 소령이 다른 부대로 전보되는 것으로 일단락지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향한 토우미사일

한편 이 날 판문점 바로 인근의 1사단 지역은 어떠했을까. 우종림 장군이 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도끼만행 사건에 대한 보복작전에 참가했다. 1976년 8월20일 저녁, 작전참모 임복진(林福鎭)중령이 미2사단 합동회의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면서 긴장의 보복작전은 카운트다운 됐다. 당시 임 중령은 유능한 참모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보복작전의 요지는 이러했다.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기 위해서 한국군 특공부대와 미2사단 병력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투입하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전군에 ‘데프콘2’(전쟁돌입 경계태세))를 발령한다는 것이다.

우 장군은 즉각 육본지휘부에 전화를 걸어 자신도 모종의 비상수단을 취하겠다고 보고했다. 풍부한 전장경험으로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 장군은 참모장에게 사단 수색대에 비상을 걸도록 명령하는 동시에 포병부대에는 가능한 한 모든 화력을 즉시 동원하라고 지시했다. 우 장군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섰다. 수색대 요원들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근접외곽에 매복하도록 해놓고 그 바로 뒤 숲속에 105, 155미리미터, 토우미사일 등 중화기를 몰래 숨겨놓았다.

작전 개시일인 21일 아침 한국군 특공부대와 미2사단 병력들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이 광경을 망원경을 통해 지켜보던 우 장군은 사격준비상태를 명령했다. 그러면서 북한군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오면 일제히 사격을 가하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북한군은 의외로 조용했고 미루나무 절단작업은 착실히 진행됐다. 그런데 3개의 가지 중 2개가 잘려나갈 즈음 ‘돌아오지 않는 다리’ 건너편에 북한 군용트럭 3대가 도착했다. 약 200여명의 무장병력들이 차에서 내려 다리입구에서 일렬횡대로 대기했다. 일촉즉발의 긴장된 순간이었다. 우 장군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북한군 병사들이 다리로 들어오기만 하면 사격개시를 알리는 손짓을 할 판이었다. 이때 북한군 장교로 보이는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우 장군의 손이 반쯤 올라갔다. 손을 번쩍 들기 직전 북한군 장교는 그만 뒤돌아서서 가버렸다. 우 장군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도끼만행 보복작전 수행시 북한에서는 19일 오후 5시를 기해 북한 전체 인민군, 노동적위대, 붉은 근위대 등 모든 정규군과 예비병력에 대해 전투태세를 내릴 정도로 남북한 모두 전쟁을 치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상황은 매우 위급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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