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베트남과 미군 양쪽에서 지원받아

1964년 10월 한 베트남간 협정체결을 맺기 직전 이 장군은 ‘파병계획단’ 일원으로 다시 베트남에 도착했다. 이세호 장군이 파병계획단장이었다. 전투부대 파병에 앞서 베트남군과 주베트남 미군관계자들을 접촉하면서 두 가지 커다란 핵심사항을 해결했다. △한국군이 파견되면 베트남정부는 베트남군과 똑같이 급식을 지급해야 한다. △주베트남 미군은 보급품, 장비, 탄약 등 전투물자 일체를 한국군에게 지급함은 물론 주베트남 미군과 똑같이 급식을 제공한다. 이 장군의 중언.

“우리 파병계획단은 베트남정부와 미국측을 각각 따로 만나 군수지원을 약속받았다. 나중에 보니 급식은 베트남군과 미군측으로부터 이중으로 지급받게 됐다. 우리는 손해볼 일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무식’이 국익을 가져온 셈이었다.”

1년 후 이와 관련된 한 가지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장군(65년 3월 장성진급)이 주베트남 한국군 100군수사령관으로 재임할 때였다. 하루는 주베트남 미군참모장이 이 장군을 부르더니 “도대체 한국군들의 위는 얼마나 크냐?”고 물었다. 이 장군은 “그게 무슨 뜻이오?”라고 반문했다. 주베트남 미군참모장은 “한국군은 몸집도 작고 그런데 급식을 베트남군한테도 받고 미군한테도 받아먹으니 어떻게 된 것이오?”라고 하면서 미군의 급식을 줄이겠다고 말했다. 이 장군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급식을 이중으로 받고 있던 한국군은 베트남정부로부터 받은 쌀은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배고픈 베트남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래서 한국군은 가는 곳마다 베트남 주민으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반면 미군은 그러지 못해 은근히 한국군을 시샘하고 있던 터였다. 이같은 사실이 주베트남 미군고위관계자의 귀에 들어갔고 미군참모장은 이 장군을 불러 따져물었던 것이다. 미군참모장의 얘기를 다 듣고 난 다음 차근차근 설명했다.

“참모장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혹시 국제법을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베트남 정부와 협정을 맺었고 또 미국과도 협정을 맺었습니다. 국제법은 당사국간에 맺은 협정을 매우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미국도 그렇지 않습니까? 당사국은 물론 다른 여러 나라와 협정을 맺고 그것을 준수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장군의 말을 경청하던 주베트남 미군참모장은 그럴 듯 했는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이 장군은 이같은 사실을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 보고했다.

이 장군은 한국군 파병과정에서 베트남땅을 세 번 밟았다. 따라서 베트남 파병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다. 첫 번째는 군사 사절단으로, 두 번째는 파병계획단으로, 세 번째는 전투부대 선발대장이면서 맹호사단 부사단장 겸 맹호부태 군수지원사령관의 자격이었다. 나중에 맹호군수지원사는 100군수사령부로 명칭이 바뀌었다. 특히 이 장군이 선발대장으로 당도한 것은 맹호부대와 청룡부대가 도착하기 전인 1965년 8월이었다. 이는 한국군 공식 전투부대 요원으로서는 맨처음 베트남땅을 밟은 기록이다.

전투부대가 속속 도착할 무렵 이 장군은 아군의 주둔지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이 때 한국군 공병대원들의 희생이 많아 이 장군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얼마 뒤 이 장군은 수소문 끝에 나트랑에 살고 있는 석지암 스님을 찾았다. 베트남은 불교의 나라로서 석지암 스님은 불교의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었다. 따라서 베트콩도 석지암 스님의 말이라면 잘 따르는 편이었다. 이 장군은 베트남군 한 명을 통역관으로 대동하고 석지암 스님과 만났다. 한국군의 희생이 많다며 이를 막을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통역관이 열심히 통역했지만 석지암 스님은 아무런 반응이 없이 묵묵부답이었다. 답답하게 여기던 이 장군이 직접 나섰다. 종이에다 아등월남보호래월(我等越南保護來越)이라고 썼다. 그러자 석지암 스님은 매우 놀라워하며 어떻게 한문을 아느냐고 물었다. 이 장군은 “한국인은 모두 한문을 공부했으며 그 깊은 뜻을 잘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석지암 스님은 “한문을 알면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이 장군의 요청대로 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후부터 십자성 마크를 부착한 한국군인들은 희생자가 단 한명도 생기지 않았다.

▲ 사진=ktv 화면 캡처

팔만대장경 월남전에서 큰 위력

불력(佛力)과 관련된 또다른 일화가 있다. 사건은 1969년 10월 백마사단 30연대 주둔지에서 발생했다. 이른바 ‘린선사 사건’이었다. 이건영 장군이 주베트남 한국군부사령관으로 부임한 지 3개월째 되는 시점이다. 린투안성 타이하이군 카투산 중턱에 자리한 ‘린선사’는 티우 대통령이 예배차 다닐 정도로 유서깊은 고찰로 소문나 있었다. 당시 베트남은 승려만 해도 200여만명, 그리고 국민 80% 이상이 불교신자인 나라로 사찰을 신성시했다. 그해 10월14일 린선사에 뜻하지 않은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69세와 71세된 남자 승려 2명, 16세와 41세된 여승 2명이 한밤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3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고 71세 승려는 중상을 입었다. 간신히 홀로 목숨을 건진 71세의 노승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내려와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노승은 “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여러 명의 한국군이 갑자기 쳐들어와 여승을 강간하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노승은 사건 현장에 뿌려진 몇장의 종이쪽지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문제의 쪽지에는 한국군의 소행임을 나타내는 흔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시 백마 30연대 1개소대 병력규모가 린선사로부터 약 3킬로미터 떨어진 비행장 공사장에 투입돼 있었다. 노승은 만행을 저지른 한국군이 바로 이 부대의 병력이라고 주장했다. 노승의 주장은 곧장 언론에 보도되어 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베트남의 불교신자는 물론 전 승려들이 들고 일어났다. 한국군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같은 보고를 접한 이건영 장군은 즉각 헌병대장과 함께 현장으로 달려가 진상조사를 벌렸다. 비행장에 파견 중인 1개 소대병력을 일일이 조사했다. 그러나 무릎자국 등을 아무리 살펴봐도 강간했던 흔적도 없거니와 사건 당일 린선사 근처에 얼씬도 안했다는 알리바이가 성립됐다. 이건영 장군은 여러 정황으로 보아 이 사건은 한국군으로 위장한 베트콩이 일을 저질러놓고 한국군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베트콩이 사전모의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결론은 어렵지 않게 내릴 수 있었다.

팔만대장경 영인본 48권 긴급공수

이건영 장군은 린선사 승려 중에 다수의 ‘찌광승’(반정부승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베트남 불교계에는 찌광승과 ‘국사계’ 승려들이 있었는데 국사계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우익이고 반면 찌광승은 좌익이었다. 이런 판국에 사건을 조기에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 누명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역구 출신 돈턴 시유 하원의원의 공세는 대단했다. 그는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승려를 살해하는 한국군을 야만인으로 몰았다.

이건영 장군은 일단 격앙된 베트남 불교계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증거물을 수집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영향력 있는 승려들을 찾아다니며 어디까지나 베트콩의 소행이라고 설득하는 한편 하원의장과 상원의장을 만나 “한국군이 일을 저질렀다면 왜 쪽지같은 것을 남기는 어리석은 짓을 하겠느냐.”면서 억울함을 강조했다. 그는 또 린선사 주지를 직접 찾아가 사건의 정황을 브리핑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인들 가운데 80%가 신자이다. 우리나라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판경전이 있다. 한국민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에도 이것만큼은 목숨걸고 지켜왔다. 그런데 하물며 죄없는 승려들을 죽이겠는가. 이것은 명백히 베트콩의 짓임을 유념해달라. 우리와 베트남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조작된 사건이다.”

이건영 장군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주지는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팔만대장경이 어떤 것인지 좀 보여줄 수 있겠소?” 하는 것이었다. 전혀 뜻밖의 반응이었다. 이건영 장군은 최단시일내에 보여줄 것을 약속하고 물러나왔다. 그런 다음 본국과 연락을 취했다. 동국대학교에서 팔만대장경 영인본을 간직하고 있다는 답신이 왔다. 그는 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 것같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뒤 영인본 48권이 비행기편으로 도착했다. 그는 제일 먼저 주지한테 달려가 영인본을 보여주었다. 팔만대장경 영인본을 펴든 주지의 안색이 밝게 변했다. 한국조상들이 불교를 어떻게 숭배해왔는지에 대해 무척 탄복해 하는 것이었다. 이어 주지는 “이 장군 말이 맞소. 불교를 숭상하는 나라의 군인들이 어떻게 승려를 살해할 수 있겠소? 베트콩의 짓임이 틀림없는 것 같소.”라고 하면서 한국군은 아무런 죄가 없음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비로소 누명이 벗겨지는 순간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이건영 장군은 또 시유 하원의원을 찾아가 이같은 사실을 전하고 더 이상 정치적으로 한국군에 대해 비난 운운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시유 의원은 “치안을 소홀히 한 도의적 책임이라도 져야 한다.”고 말했고 이건영 장군은 “치안은 경찰이 담당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렇게 해서 본국에서 긴급 공수해온 팔만대장경 덕택에 자칫 한국과 베트남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될 뻔한 사건이 극적으로 해결됐다.

팔만대장경의 불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1년 초 베트남 경찰은 린선사 습격살인범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 지역에서 베트콩 한 명이 생포됐는데 그의 소지품에서 ‘린선사 작전’을 성공리에 수행했다는 표시가 새겨진 공로패가 나옴으로써 결정적인 단서를 확보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즉각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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