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엘 마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콜롬비아 영화계의 신성 마놀로 크루즈가 각본, 연출, 주연을, 카를로스 델 카스티요가 공동 연출을 맡은 ‘엘 마르’는 상업영화의 공식에 익숙한 이에겐 초반에 지루하고 결국 불편함 끝에 ‘왜?’라는 의문만 남겠지만 삶의 명분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본 이에겐 감동적일 것이다.

일찍 바다에서 남편을 잃은 로사(비키 에르난데스)는 바다에 인접한 수상 가옥에서 퇴행성 근육긴장 질환으로 어릴 때부터 누워 지내는 아들 알베르토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봐주며 살고 있다. 알베르토는 작은 거울 하나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지만 이성친구 지셀(비비아나 세르나)이 있어 행복하다.

모든 걸 아낌없이 주는 엄마가 부족한 가족의 구성을 채워준다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즐겁게 놀아주는 미녀 소꿉친구 지셀은 판타지의 총합이다. 지셀은 알베르토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일부러 한 자선단체에 입사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지만 왠지 로사는 그녀와 그녀의 엄마 마리아에게 쌀쌀맞다.

결국 로사는 마리아와 지셀에게 더 이상 알베르토를 찾아오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 이유는 남편이 생전에 마리아와 바람을 피웠고, 그런 마리아의 부탁으로 바다에 나갔다 죽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 그래서 그녀는 알베르토와 지셀이 이복남매일 가능성을 놓고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

▲ 영화 <엘 마르> 스틸 이미지

게다가 알베르토는 비록 장애인이라고는 하지만 성욕이 왕성한 30대 청년이다. 지셀이 결혼해줄 리도 만무하지만 그런 불행한 결혼을 용인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가 찾아와 로사와 허심탄회하게 그동안 쌓았던 오해를 모두 푼다. 남편과 마리아는 아무 관계가 아니었던 것.

그렇게 다시 지셀의 출입은 계속되는데 어느 날 낮 여느 때처럼 알베르토의 방에 나타난 지셀은 그가 낮잠 중에 야릇한 꿈을 꾸고 흥분하는 걸 목도하고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알베르토의 눈과 마주친다. 이 난처한 상황에서 당황한 지셀은 황망하게 밖으로 뛰쳐나간다.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알베르토가 스스로 얌전함 속에 숨겼던 광기가 폭발하고, 내용은 모르지만 분위기는 짐작한 로사는 그를 말리고 달래며 더욱 괴로움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간신히 수치심을 가라앉힌 알베르토는 로사에게 “바다가 보고 싶다”고 애원하면서 휠체어를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데.

기신기신한 몸놀림이 전부인 알베르토는 전기로 구동되는 생명유지 장치 없이는 장기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 그가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는 늘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한다. 잠자는 시간만 빼면 눈앞에 펼쳐지는 집안과 작은 거울로 보는 도로변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 영화 <엘 마르> 스틸 이미지

로사에게 알베르토는 아들인 동시에 남편의 환생이자 잔영이다. 늘 바다가 보고 싶다고 생떼를 쓰고 뭔가 한 가지에 집착하면 고집불통인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로사는 “넌 아버지랑 똑같아”라고 불평을 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다. 자신도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지만 아들 뒷바라지가 행복하다.

그래서 “넌 나의 빛이야”라고 말한다. 에필로그의 ‘작은 틈으로 스며든 빛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문구는 중의적 표현이다. 알베르토-로사-지셀은 모두 서로에게 프리즘을 통해 확산되는 사랑의 빛이다. 인생과 존재의 세계를 바꿀 만큼. 이 무참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햇살과 물의 생명력!

알베르토와 지셀은 어릴 때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 알베르토가 병상에 눕고 지셀은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레 알베르토와 멀어졌고, 성인이 돼 사회에 진출한 뒤 상처를 받았다. “쉽게 안 떠날 너 같은 남자가 필요해”라고 알베르토에게 말하는 게 그 증거다. 그녀의 사랑의 근거다.

그녀가 문이 아닌 알베르토의 침대 머리맡으로 출입하는 건 알베르토의 머릿속이 온통 그녀 생각으로 가득 차있다는 의미고, 그녀 역시 그런 알베르토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은유다. 체제와 욕망에 상처를 입은 그녀는 형상은 불안정하지만 내면만큼은 해맑은 알베르토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다.

▲ 영화 <엘 마르> 스틸 이미지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고, 그래서 이웃의 숭고한 관심마저도 오해하는 로사에게는 온통 프리즘을 통한 굴절투성이다. 지셀에게 관심을 꺼달라며 그 이유로 “(사람들은) 그래봤자 귀찮아하고 실망만 해. 신경 쓰다 귀찮아지면 내팽개칠 게 뻔하잖아. 그러면 우린 상처만 받을 뿐이지”라고 손사래를 친다.

본능(사랑)과 욕망(성욕), 육체와 정신, 성장과 성숙, 현실과 환상이란 같은 듯 다른 이항대립과 이율배반의 양면성의 공존은 굳이 바다가 배경이라서가 아니라 이래저래 뤽 베송의 ‘그랑 블루’가 오버랩된다. 아버지를 바다로 떠나보낸 자크, 그의 연인 조안나와 친구 엔조의 얘기.

알베르토는 아버지를 바다로 떠나보냈지만 잠수를 해야만 안정감을 느끼는 자크와 다름없다. 자크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조안나가 막아도 심연에서 영면하고자 함은 앞서 엔조가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를 지켜주는 돌고래가 유영하는 심연이 진짜 자신의 가정(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 솜씨가 좋은 알베르토가 로사에게 파랑 장미 그림을 선사하는 건 백미다. “엄마한테 이러지 마”라고 하면서도 알베르토의 본래적 존재를 찾고자 하는 의지에 찬성하는 비키의 연기력은 놀랍다. 처절한 고통을 ‘삶을 앎’의 미학으로 승화한 흔치 않은 영화다. 12살 이상. 98분. 10월 2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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