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한진그룹 노무자들과 잊지 못할 인연

다시 이범준 장군 얘기로 이어진다. 1966년 주베트남 한국군 100군수사령관으로 근무할 때 이 장군은 한진그룹(당시 한진상사)의 노무자들과 잊지 못할 인연을 맺었다. 그해 1월 퀴논지역에 한국인 노무자 200명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한진상사 직원들이었다. 이튿날 대표되는 몇 사람이 이 장군을 찾아왔다. 이들은 미군과 계약을 맺어 군수물자 하역작업을 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거할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신변안전을 위한 아무런 대비책도 없다며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딱했다.

이 장군은 채 사령관에게 한진 노무자들의 사정을 보고했다. 채 사령관은 이 장군에게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 장군은 우선 20인용 군용천막 10개를 빌려주고 식사도 한국군에서 지급토록 했으며 야간 경비업무도 한국군 병사가 담당하도록 조치했다. 이 장군은 얼마 뒤에 미군 기계화사단이 도착하자 한진 노무자들이 일할 수 있도록 계약주선까지 해주었다. 그러자 이들은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매우 흡족해 하며 감사를 표했다. 이 장군은 미군 관계자들을 만나 크고 작은 일거리를 계속 이들에게 알선해주기도 했다. 이 장군은 한진뿐만 아니라 다른 국내업자들에게도 일감을 연결시켜주기도 했다.

피복과 김치는 본국서 공수

1967년 말이었다. 이 장군은 예하부대를 순시하던 중 우연히 병사들의 불만을 듣게 됐다. 미군측으로부터 지급받은 피복이 너무 크다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이같은 내용을 미군수사령관에게 정식으로 건의했다. 한국군 체형에 맞는 피복이 필요하며 이는 전투력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얼마 후 새로운 피복샘플이 왔다. 이 장군이 직접 입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 ‘Made in Japan’이라는 제조국 마크가 표시되어 있어 썩 내키지 않았다. 이 사실을 채 사령관에게 보고했더니 “우리가 어떻게 일본제품을 입을 수 있겠느냐”며 한국에서 만들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이를 위한 은밀한 작전을 짰다.

▲ 사진=ktv 화면 캡처

그러던 중 기회가 왔다. 며칠 후 미국의 맨스필드 의원 등 상하원 의원 115명이 베트남을 방문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또 한국군 지역도 방문한다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 방문대상은 맹호부대의 한 포병대대였다. 이 장군은 채 사령과 미리 논의된 각본대로 몇 가지 사항을 예하부대에 지시했다. 며칠동안 바지만 입은 채 옷을 다 벗고 다니라고 했다.

드디어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맹호부대를 방문했다. 생각했던 대로 의원들은 옷을 벗고 다니는 한국군 병사들을 보자 고개를 갸우뚱하며 의아해 했다. 일행 중 한 의원이 웨스트 모얼랜드 주베트남 미군사령관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미 사령관은 이 장군에게 되물었다. 이 장군은 자신도 잘 모르겠으니 소대장을 불러 직접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답변했다. 호출받은 소대장이 군복 한 벌을 들고 일행 앞으로 다가왔다. 소대장의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는 이 옷을 절대 입을 수가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일본제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본에서 만든 옷을 입을 수가 있겠습니까. 병사들의 사기도 말이 아닙니다. 일본 옷을 입고서는 전투하지 못하겠다는 불만이 많습니다.”

소대장의 말은 이미 각본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소대장은 또 일행들에게 제조국 마크를 보여준 뒤 그 자리에서 제조마크를 찢는 연극을 연출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를 본 미군 관계자들은 한국군의 애국심에 감탄해 하며 한국군이 입을 피복만큼은 한국에서 만들도록 다시 조정했다.

이 장군은 내친 김에 김치문제까지 꺼냈다. 그동안 한국군은 ‘김치가 없으면 식사를 못한다’는 사정을 미군측에 이해시켰다. 베트남 야채로 김치를 만들지 말고 기왕이면 김치를 한국에서 공수해 오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장군은 미군수사령관을 만나 베트남 야채로는 김치를 담글 수가 없다고 말했다. 야채가 맛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수송 도중 대부분 썩어 없어진다며 아예 한국에서 김치를 담가 공수를 해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이 장군은 병사들이 한국 토속김치를 먹어야 사기가 더 충천해진다고 강조했다. 이 장군의 설명이 그럴 듯 했는지 미군수사령관은 흔쾌히 수락했다.

이 장군은 채 사령관에게 이같은 사실을 알린 뒤 본국에 긴급 전문을 보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즉시 김치공장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이후부터 한국군은 본국에서 수송된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수송기간이 길어서인지 대부분의 김치가 상해 내다버리는 것이 많았으나 미군들이 오면 일부러 맛있게 먹는 것처럼 시늉을 했다.

5.16 주체에서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으로

▲ 사진=ktv 화면 캡처

베트남전의 영웅으로 꼽히는 채명신 장군은 5사단장을 맡을 때인 1961년 병력을 이끌고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혁명에 가담해 혁명주체세력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생전에 말했다.

“당시의 혼란 상황이 군인이 아니면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 혁명에 가담했지요. 동기는 순수했습니다. 혁명공약에 나타났듯이 사회가 소기의 목적대로 안정됐다고 판단되어 저는 군으로 복귀했지요.”

채명신 장군은 혁명이 성공하면서 최고회의 감찰위원장을 맡았다가 3관구사령관과 육본작전참모부장 등을 역임하고 1965년 8월 초대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 겸 맹호부대장으로 참전, 전쟁영웅으로 화려한 명성을 날린다. 게릴라전의 맹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 채 장군이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이 된 것은 백골병단 사령관을 역임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파병이라는 점에서 내외의 이목을 집중시킨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 내정은 채 장군의 전력으로 볼 때 당연하다고 볼 수 있지만 경쟁상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만 해도 군부는 이북출신 장군들이 득세할 때여서 누가 적임자인가를 놓고 박정희 대통령은 고심을 했다. 이때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성들의 신상을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김 부장이 한국전쟁시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고 전후방에 침투해 눈부신 전공을 세운 같은 이북 출신의 채 장군을 베트공의 유격전에 맞설 적임자로 추천한 것이다. 25세때 중령계급장을 달고 유격전을 체험한 채 장군은 이미 모택동, 카스트로, 체게바라 등의 유격전술과 전략을 두루 익힌 터라 그의 사령관 임명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는 별로 없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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