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산성 올라가 이화문전(李花門前) 바라보니
수진이 날진이 해동청(海東靑) 보라매 떳다 봐라 저 종달새~
석양은 늘어져 갈매기 울고 능수버들 가지 휘늘어진데
꾀꼬리는 짝을 지어 이산으로 가며 꾀꼬리 수리루 음허~‘

▲ 바둑판처럼 정교한 2.5km 둘레의 남원성_북쪽 성벽에서 바라본 성안과 성밖

[미디어파인=최철호의 한양도성 옛길] 남도민요 가락이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이화문전이 아니라 단풍직전처럼 남원성에서 교룡산성까지 오르는 길은 오색에 물든다. 바람은 서늘하고 햇볕은 따뜻하다. 남원성(南原城) 북쪽 성벽을 지나 해자를 보니, 어디서 물줄기를 끌어왔을까. 바로 향교 아래 흐르는 축천(丑川)이다. 이름이 생소하지만 정겹다. 소울음소리와 철우(鐵牛)가 생각난다. 축천을 건너니 남원 사직단이 눈앞에 보인다.

지방 사직단 중 가장 잘 보존 되어있는 남원 사직단에 오르다

▲ 서울 사직단과 같은 시기에 세워져 잘 보존된 남원 사직단

동산에 우뚝 솟아 제(祭)을 지냈던 단(壇)이 남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서울 사직단의 규모에 견줄 수 없지만, 조선초부터 현재까지 남원 사직단이 유지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직단 주변 활엽수가 울창하다. 주변의 참나무와 굴참나무가 600여 년 함께한 위엄을 세월로 말해준다. 상강(霜降)이 지나 입동(立冬)을 향하는 절기에 상수리와 도토리가 사직단의 주인처럼 사방을 나뒹군다.

▲ 421년 전 정유재란시 남원성 전투에서 1만여 명의 희생자가 잠든 곳_만인의총

교룡산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이다. 사직단을 내려와 만인의총(萬人義塚)을 지나면 교룡산으로 가는 길이다. 가을걷이를 한 볏단과 감나무에 매달린 누런 감들이 마지막 가을을 아쉬워 한다. 518m 교룡산 정상을 향하는 초입에는 동학의 성지를 알리는 수운 최제우 선생의 말씀이 비석에 새겨져 있다. ‘도(道)는 천도(天道)요, 학(學)은 동학(東學)이다.’ 동학의 시작을 이곳에서 하였다니 산세와 지세를 다시금 느껴본다. 교룡산을 등지고 확 트인 지리산을 바라본다. 병풍처럼 펼쳐진 지혜로운 산, 지리산(智異山)은 4계절 24절기 절경이다.

518m 교룡산에서 3.12km 교룡산성을 시간여행하다

▲ 교룡산성 선국사 보제루에서 바라본 전경_지리산과 남원의 가을 절경

남원은 산(山)이다. 산과 산이 이어져 있다. 산과 산 사이에 성곽이 있고, 성벽과 성문이 있다. 교룡산성 입구에 서니 계곡물이 흐르고, 수문이 나온다. 수문과 성벽 사이에 옹성 보다 작은 치성이 있다. 산비탈로 이어지는 성벽이 보이고 성문에 다다른다. 수문장이 나올 듯 하다. 성문은 홍예문이다.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홍예문 위에 문루도 있었을 것이다. 주 출입문이자 수문이 있는 동문이다. 홍예문을 통과하니 비석군이 즐비하다. 그 당시 남원부사와 별장들의 기적비다. 비석의 모양들이 제각각이지만 그 당시 시대상이 읽혀진다. 비석은 작지만 위엄이 느껴진다.

▲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인 성문_홍예문과 성벽

홍예문에 우뚝 솟은 느티나무를 지나니 양쪽에 성벽이 이어진다. 계곡과 계곡을 끼고, 99개의 우물을 간직한 천혜의 요새다. 남원 민중을 보호 할 수 있는 철옹성이다. 교룡산성은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높은 성벽은 3.12km 둘레로 이어져 있다.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말까지 수많은 외침을 버텨온 산성이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제자 처영(處英)이 승병장으로 홍예문을 증축하고 왜란에 대비하였다.

▲ 교룡산성 안 선국사 보제루에서 바라 본 지리산과 남원

교룡산성의 가장 중요한 통로인 홍예문을 지나면 선국사(善國寺)가 보인다. 한때 승군들이 주둔하며 용천사(龍泉寺)는 나라를 지키는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선국사에서 중요한 군사전략을 수립한 곳이 보제루이다. 보제루에서 바라보면 지리산과 남원이 한눈에 펼쳐진다. 언제 올라 보아도 절경이었던 보제루는 세월의 흐름에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남문을 향하는 곳에는 수어장대터와 소금을 저장한 염장터도 보인다. 완벽한 산성의 모습이다.

교룡산에서 지혜로운 산,지리산을 바라보다

▲ 도선국사가 창건한 남원성 동문밖 비보사찰_선원사

하늘을 받치고 솟은 듯 밀덕봉과 복덕봉이 교룡산의 주봉이다. 주산인 만행산이 약하고,객산인 교룡산이 강한 형국이라 비보사찰을 지었다. 선원사(禪院寺)는 약한 기운을 복돋는 역할을 하였다. 대복사(大福寺)는 강한 파도를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 옛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남원의 안녕을 위해 내린 판단이라고 한다. 자연의 흐름과 인간의 흐름을 조화롭게 이어가는 곳이 바로 남원이다. 1330여 년 전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다. 지금의 광역시격인 남원경(南原京)이다.

▲ 남원성 서문밖 만복사지에 있는 우뚝 선 아름다운 석인상

읍성(邑城) 중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고을이다. 산성(山城) 중 가장 역사적인 전투가 있었던 도시이다. 여뀌꽃이 아름답게 피는 요천(蓼川)이 흐르는 고장이다. 물 맑고 돌 깨끗하여 은어 서식지였던 요천이다. 하늘에서 보면 은하수와 닮은 꼴,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한다. 요천의 맑은 물은 압록을 지나 구례 하동 섬진강(蟾津江)으로 향한다. 아름다운 섬진강의 시작이 남원성 광한루 앞 요천이다.

바둑판처럼 정교한 남원성의 역사와 유래를 만나다

▲ 교룡산성 남문 성벽에서 바라본 성안과 밖_지리산 아래 남원이 한눈에 보인다

남원은 마한의 이상향 달궁에서 시작하여 백제의 고룡군과 대방군으로 큰 고을이었다. 통일신라 9주 5소경의 하나인 남원경으로 군사 및 행정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 남원부,조선시대 남원도호부로 한강 이남 삼남지방의 중심지이며, 교통과 군사의 전략적인 요충지이었다. 또한 남원읍성은 남원부의 중심부를 둘러싼 석축성이다. 평지에 바둑판모양으로 외성과 내성, 사방에 해자와 4개 성문에 다리까지 건축한 완벽한 읍성이었다.

▲ 남원성 지나 축천 위 만인의총의 가을풍경

남원성은 2.5km 둘레, 4m의 성벽 높이에 여장,그리고 70여개 우물을 갖춘 전략적 요충지의 성이었다. 성안에는 4성문과 객사인 용성관 및 휼민관,광한루와 오작교가 있었다. 남원성 서문밖 만복사와 관왕묘, 동문밖 선원사와 수해방지 비보림인 동림(東林)이 있었던 계획적인 도시이었다. 고대 건물의 3걸로 광한루,관왕묘,용성관은 남원의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다.

▲ 교룡산성 남문 성벽에서 바라본 성안과 밖_지리산 아래 남원이 한눈에 보인다

교룡산성에서 내려와 남원성을 향한다. 교룡산에 비치는 석양은 남원팔경(南原八景)을 알리듯 눈속에 빨려든다. 해질녁 은은한 선원사 종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교룡산 아래 너른 들판에 수진이 날진이 산진이가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을 난다. 응봉이 어디일까. 매들이 허공을 난다. 송골매와 참매를 찾아 다시 오고 싶다. 광한루 하늘 위에 가을달이 뜬다. 함박눈이 내리는 축천의 저녁설경을 그리며 가을속 남원을 벗어난다.

천년의 역사와 문화가 있는 고을, 남원(南原)
421년 전 정유재란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고장,
남원성 전투에서 졌지만 결코 지지 않았던 역사의 중심지,
교룡산에서 남원성(南原城) 영화 제작을 꿈꾸며 희망을 심는다.

▲ 최철호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 (저서)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최철호 소장]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한양도성에 얽힌 인문학’ 강연 전문가
한국생산성본부 지도교수
지리산관광아카데미 지도교수
남서울예술실용전문학교 외래교수

저서 : ‘한양도성 성곽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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