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베트콩 유격전에 맞선 게릴라 맹장

▲ 사진=ktv 화면 캡처

국민들의 열렬한 전송을 받으며 베트남 전선에 도착한 채 사령관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정글 속을 비호같이 누비는 베트콩도 아니요, 그렇다고 월맹의 정규군은 더 더욱 아니었다. 베트남 파병되기 전부터 전쟁공포에 떠는 사기문제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현지에 도착한 뒤에는 장병들이 더욱 겁에 질려 있었다.

“정글에는 베트콩이 무수히 파놓은 함정이 곳곳에 있었고 함정에 빠지면 죽창에 찔려 죽는다, 베트콩이 언제 어느 곳에서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풍문 등으로 장병들이 극도의 불안감에 벌벌 떨고 있었지요. 심지어 경계근무를 하는 병사들은 야간에 나무만 흔들려도 베트콩인 줄 알고 총을 갈겨댔습니다. 그런 정신상태로 어떻게 전투를 하겠습니까.”

이를 보다 못한 채 사령관은 “재수없으면 길을 가다가도 벼락에 맞아 죽지만 재수 있으면 포탄이 떨어져도 살아남는다.”는 운명론으로 장병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한편, 한 달가량은 작전을 의도적으로 피한 채 자체방어와 야간훈련에만 주력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한국군이 현지 적응을 할 때까지 아군진지의 외곽방어는 미군이 맡도록 하고 부대단위로 거점을 확보하는 일에 우선 손을 썼다. 한국군이 오자마자 작전을 하지 않는 것을 본 베트남의 민병대원들은 실망한 나머지 한국군을 형편없는 겁쟁이로 몰아세우기까지 했다.

채 사령관의 계획은 우선 주둔지역을 중심으로 자체방어를 끝낸 뒤 다음 단계로 책임전술지역을 차츰 확장해 나갈 셈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점을 거점으로 확보해서 세력을 뻗쳐나가는 모택동의 게릴라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당시 미국의 ‘수색섬멸’ 전법과는 현저하게 다른 전술개념이다. 아군이 채택한 이 전법은 중대단위로 진지를 구축하고 외곽지역을 소규모의 수색대로 순찰시켜 적을 유인, 섬멸하는 ‘중대전술기지’ 개념이다. 후일 이 전법은 캄보디아 국경 근처에서 아군 1개중대가 월맹 정규군 1개연대의 공격을 받고도 이를 완전히 섬멸한 ‘두코작전’ 등 각종 전투에서 그 우수성이 입증되어 한국군의 용맹성을 세계에 떨치게 된다.

채 사령관의 지휘방침은 확고했다. 남의 나라에 와서 피를 흘리면서까지 굳이 작전지역을 더 많이 확보할 생각을 하지 말도록 지시해 두어 장병들을 감동케 했다. 적이 공격해 오거나 그런 기미가 있을 경우 용감히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굳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적을 목숨걸고 찾아다니며 전투를 벌여 아군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채 사령관의 지론이었다.

“물론 전투는 살상과 책략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지휘관일수록 살상보다는 전략에 더욱 전념합니다. 전쟁은 어차피 생명의 위협을 수반하게 되지만 지휘관은 생명의 위험도를 얼마나 감소시키느냐가 중요합니다.”

채 사령관의 지휘방침과 전략을 잘 알고 어느 정도 전투에 자신감이 생긴 장병들은 그 이후 크고 작은 작전에서 적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맹호와 백마부대의 장병들이 합동으로 베트남의 중부해안 투이호아와 퀴논을 연결하는 국도와 철도를 개통하고 지역내의 적을 완전 소탕한 ‘오작교 작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채 사령관이 채택한 전법과 지휘방침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하나의 좋은 예이다.

한국군은 스승을 가르치는 스승

▲ 사진=ktv 화면 캡처

미군이나 베트남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군의 전투력이 월등히 높자 웨스트 모얼랜드 주베트남 미군사령관은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 석상에서 베트남전에 대해 보고를 하는 가운데 “한국군은 가장 훌륭한 전투력을 가진 우수한 군대로서 스승(미군)을 가르치는 스승(한국군)이다.”라고 한껏 추겨세우기까지 했다. 또 한국군의 전술개념이 베트남전에서 매우 성공적인 작전으로 판명되자 미군은 이를 미보병학교의 교재로 채택하기에 이르렀고 베트남군도 따라서 배워 익힐 정도였다.

그리고 파병 초기 한국군을 사사건건 간섭하려던 미군으로부터 작전권을 인수한 것도 채 사령관의 공적 중 하나였다. 파병 전부터 작전권 문제를 놓고 한미정부간 논란을 벌이던 중 베트남에 부임한 채 사령관이 미군수뇌부들과 모인 작전회의에서 한국이 배트남에 뛰어든 정치적 배경과 한국군이 미군지휘를 받을 경우 파생될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나열하며 설득, 웨스트 모얼랜드 사령관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채 사령관이 당시 군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었다. 채 사령관은 박정희 대통령과 두 번에 걸친 독대에서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면서 미운털이 박혔는지 1972년 6월2일 끝내 대장으로 진급을 못하고 중장으로 예편됐다. 돌이켜보면 주베트남 한국군사령관으로 있던 1966년 중장으로 진급, 군부에서 승승장구하던 채 사령관의 출세가도는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다.

“제가 예편하게 된 것도 박 대통령의 집권연장을 만류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됐는지는 몰라도 당시에는 그저 순수한 마음에 반대했을 뿐이지요.”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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