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1991, 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권경원 감독)은 역사는 강물처럼 흘러가지만 살아있으며 돌아오기도 하기에 과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며 다원성과 통일성을 하나로 보고 대립물의 충돌과 조화가 중요하다고 주장한 헤라클레이토스를 연상케 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지만 이듬해 들어선 노태우 정권은 전임 전두환 정권의 폭정을 그대로 이었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조폭은 발본색원-일망타진 못했다. 1987년부터 1991년까지 120명의 무고한 학생과 노동자가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분신한 열사가 있고, 공권력의 폭력에 희생된 투사도 있으며, 의문사로 처리된 영혼도 부지기수다. 1991년 4월 29일 등록금 관련 시위에 나선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전경의 쇠 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은 뒤 1달간 죽어나간 젊은이가 11명. 5월 8일 김기설 씨의 자살이 분노를 최대치로 올린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자 서강대생인 김 씨는 어버이날 부모에게 유서 1장만 남긴 채 몸에 불을 붙인 후 투신했다. 그러자 박홍 서강대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라고 ‘선동’하고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며 정권의 배후설을 뒷받침한다.

▲ 영화 <1991, 봄> 스틸 이미지

검찰은 강기훈 씨를 자살방조 및 유서대필 혐의자로 지목하고 강 씨는 명동성당에 피신 중 구속된다. 3년 후 만기 출소한 그는 2015년 5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권고로 이뤄진 재심을 통해 드디어 대법원에서 무죄 최종 판결을 받게 된다. 그의 잃어버린 24년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그가 잡힌 후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한다. 도대체 아들이 뭘 겪었고,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한 학기를 마친 뒤 생을 마친다. 강 씨는 현재 말기 암 환자다. 이 나라는 왜 무고한 젊은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그 가족들의 행복을 파괴했을까?

감독은 뉴스, 인터뷰, 인형극, 자료 등으로 그 시대를 이겨낸 젊은이들과 민주 투사들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다. 주인공인 강 씨는 인터뷰 하나 없이 말을 아끼는 가운데 ‘아멜리아의 유서’ ‘성당’ ‘눈물’ ‘망각’ ‘사라방드’ 등의 기타 연주곡으로 각 시퀀스의 주제 및 상황을 설명하는 무언의 내레이터가 된다.

그해 5월 25일 대한극장 앞에서 평화시위에 참여했던 서강대생 채수진(20) 씨는 전경의 폭행으로 백병원에 입원했는데 같은 처지의 성균관대생 김귀정(24) 씨가 사망한 사실을 알고 치를 떤다. 한때 젊은 지성의 우상이었던 김 시인은 ‘네크로필리아’ 운운하며 젊은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부관참시한다.

▲ 영화 <1991, 봄> 스틸 이미지

노동운동 열사 박창수 씨의 시신을 전경이 무력으로 강제 탈취하는 등 당시의 공권력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때의 천인공노할 인권유린 및 자유와 정의의 말살과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다. 여러모로 ‘택시운전사’와 ‘1987’을 연관 짓지 않을 수 없으며 1991년을 최초로 다뤘기에 의미가 큰 영화다.

다큐멘터리는 물론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픽션이 관객에게 호소하는 건 역사 바로 알기 및 세우기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교과서로 역사를 날조하려다 실패한 데서 보듯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1000개의 혀, 1만 개의 입술로 강조해도 결코 과하지 않다. 밝은 미래는 바로 보는 과거에 의해 보장된다.

‘사람들은 시시한 진실보다 재밌는 거짓말에 귀 기울이고, 정당한 실패보다는 날조된 성공을 동경한다’는 내레이션은 무척이나 뼛속 깊이 와닿기에 참으로 무참하다. 왜 적지 않은 국민은 진실을 보는 시력이 낮고, 정의를 판단하는 의식이 흐리며, 가치관이 천박한지 지적하는 날카로운 한 자, 한 자다.

심리학에 ‘칵테일파티 효과’와 ‘선택적 주의’라는 용어가 있다. 사람들은 소음과 다양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도 자기에게 필요한 말과 내용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본주의가 키운 건 생활의 편리함뿐만 아니라 이기주의의 극대화를 통한 악마와 괴물의 양산이라는 이 참담한 웅변, 참혹한 자조!

▲ 영화 <1991, 봄> 스틸 이미지

이른바 철학이 말하는 가치론의 전도다. 정의를 통해 사회적 질서가 확립되고 저마다 지고지순한 이성의 고양으로 지혜와 신앙으로 나아감으로써 함께하는 세상이 진리임을 거부한 채 나와 내 가족만 부와 권력을 누릴 수 있다면 범죄나 타인의 피해쯤은 가리기만 하면 된다는 잔인한 이기심!
    
영화는 ‘시시한 삶’을 추구한다는 강 씨를 미시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듯, 피상적 구도로 좇는 듯하지만 끝 무렵에 ‘죽음이 우릴 깨우친다’는 묘비명을 적은 그의 사진 작품을 클로즈업하며 참다운 삶이란 뭣인가를 묻는다. 아니, 삶과 죽음의 가치와 의미를 가르친다. 참된 가치관과 올바른 생을 암시한다.

역사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언로가 얼마나 막혔었는지, 두 정권의 비리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파도 파도 끝이 없는가 하면 유난히 국민들의 이념 대립이 두드러진 이 혼돈의 시대에 다름의 다양성과 개성의 독창성에 대한 주장이 감격스럽다. 조소와 경멸에 낯 뜨겁다.

역사를 왜곡하는 자를 단죄해야 하고, 그걸 믿는 자를 깨우쳐야 하며, 그렇게 돼야 함을 지금까지 젊은이들이 스스로의 희생으로 노력해왔음을 피눈물로 토해내면서 강 씨 등 수많은 민주 투사들의 1991년을 훑어가는 방식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진실이 가진 힘이다. 89분. 12살 이상. 10월 3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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