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창궐>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창궐’의 장동건, ‘암수살인’의 주지훈, ‘아수라’의 황정민의 공통점은 누가 봐도 상업영화의 주연‘급’ 배우가 악역을 맡아 돋보였다는 것이다. 언제부턴가 배우가 연기력의 완성을 위해 거쳐야 할 필수 관문, 혹은 톱스타가 슬럼프를 극복하거나 피해야 할 최종 배수진으로써 악역이 각광받고 있다.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에서 주연급 배우가 악역을 맡는다는 건 극히 이례적이었고, 제작 시스템 역시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2001년 ‘친구’에서 장동건과 유오성이 수위 분간이 힘든 안타고니스트를 동시에 맡아 크게 성공함으로써 터부가 깨지기 시작해 이제는 ‘창궐’ 중이다.

국내 영화계의 가장 인상 깊은 악역이라면 단연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역은 흔하지 않은 데다 촬영 후 그 후유증이 엄청나게 크기에 배우가 덥석 무는 게 쉽지 않다. 이에 비해 위 세 배우가 그동안 맡은 악역은 작품의 장르나 메시지나 흥행성 덕에 플러스로 작용했다.

영웅은 아니더라도 정의로운 프로타고니스트를 맡아 마땅할 정상급 배우들이 왜 자꾸 안타고니스트에 몰리는지에 대해선 전술했다. 그럼 왜 제작진이 그런 선택을 하고, 대다수 관객은 그에 동의, 열광하는 것일까? 니체의 ‘가치전도’가 바로 답이다. 문화와 생활상의 변화에 따른 인식의 변혁이다. 

▲ 영화 <암수살인> 스틸 이미지

신성일로 대표되던 20세기 중후반 대한민국 영화의 첫 전성기 때 남자 주인공 하면 잘생긴 순정파이거나 다소 마초적일지라도 지고지순한 애정관과 사랑마저도 의리로 여기는 캐릭터였다. 한때 어둠의 세계에 몸담았다 할지라도 결국 완전한 사랑과 올곧은 인생을 위해 똑바로 서는 남자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은 배우가 대중목욕탕이나 식당조차 다니기 힘들다는 에피소드는 최근에도 적용된다. 주된 시청자의 나이가 좀 있기 때문이다. 신성일 시대의 악역 전문 배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남자든 여자든 배우라면 으레 주인공 아니면 최소한 그 조력자 역을 선호했다.

하지만 할리우드의 대(大) 배우들이 비중이나 주, 조연에 상관없이 캐릭터가 우수하고 감독이 믿음직스럽다면 거침없이 출연하는 걸 종종 접하고, 한국 영화도 급성장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장동건이 드라마 배우로서 정상에 있을 때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조조연으로 출연한 게 대표적.

그런 연기력 향상과 훌륭한 필모그래피 소유를 위한 배우들의 노력은 주연, 조연 혹은 영웅, 악당을 가리지 않는 진폭의 확장을 가져온 것이다. 이는 현대 관객들의 수준이 영화의 그것을 선도하게 됐기에 가능했다. 이제 관객은 언론 플레이에 속지 않고, 배우의 이름값에 무작정 투자하지 않는다.

▲ 영화 <아수라> 스틸 이미지

‘신 스틸러’라는 말이 크게 유행되는 것도 그런 흐름의 한 증거다. ‘조연 아무개 때문에 좋았다’는 관람 후기가 흔해진 것은 동의어다. 심지어 연예 기획사가 톱스타를 내주는 조건으로 중요한 조연에 자사 소속 신인(무명) 배우의 캐스팅을 옵션으로 내거는 ‘끼워 팔기’가 관행화되는 흐름까지 낳았다.

그런 관객의 인식의 전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20세기와는 사뭇 달라진 데 기인한다. 이제 ‘극장 구경 가자’는 말은 없어진 지 오래다. 심지어 진짜 영화 외에도 구경하고 즐길 게 많은 멀티플렉스가 자리 잡았음에도. 그건 영화가 문화예술이면서도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20세기 말 정권교체라는 아고니스트를 통해 비로소 진짜 민주주의에 입문한 젊은 세대의 의식과 인식과 이념은 독재정권의 압제와 데마고기에 찬 프로파간다에 의해 세뇌된 기성세대와 다른 가치전도다. 영화의 선택과 배우의 가치판단 기준이 확연히 달라진 건 자연스러운 시대의 변화의 반영이다.

주지훈은 ‘신과 함께; 인과 연’에서 전편보다 더 잔망스러운 매력을 뽐내며 확실히 존재감을 알렸다. 하지만 ‘공작’과 ‘암수살인’의 악역이 없었다면 현재의 위치로 올라설 수 있었을까? 최근 두 악역 영화가 잇달아 개봉되지 않았다면 ‘그’ 나이에 연기파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 영화 <다크나이트> 스틸 이미지

‘수어사이드 스쿼드’ 같은 영화가 등장하는 건 일단 소재의 고갈이 원인인 건 맞다. 하지만 관객들의 수준이 높아지고 입맛이 까다로워짐에 대한 대응책인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그런 흐름을 먼저 잘 읽고 실행에 옮긴 감독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크리스토퍼 놀란과 ‘왓치맨’의 잭 스나이더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 역을 맡은 히스 레저가 후배들이 가장 동경하는 롤모델이 된 건 요절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악랄하면서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역대 최고의 빌런 캐릭터를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안타고니스트 캐스팅을 자청하는 모든 배우들의 밑그림은 아마도 레저의 조커일 것이다.

선과 악의 경계선을 포함한 가치전도다. 니체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1872)의 ‘디오니소스적 긍정’은 전통적인 도덕관과 기독교의 윤리에 집착하던 당시 ‘엘리트’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아마 이유리를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으로 착각하고 욕을 퍼붓는 ‘꼰대’가 받았을 경악일 것이다.

어쩌면 이런 프로타고니스트‘용’ 주연배우들의 안타고니스트 선택이란 ‘반란’은 약자의 가치전복을 통한 역사 주체로의 부상인 니체의 ‘주권적 저항’은 아닐까? 그렇다면 야귀로 출연한 엑스트라까지 엔딩 크레디트에 올린 ‘창궐’처럼 모든 영화인들의 장인정신을 향한 박수갈채와 응원일 것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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