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뷰티풀 데이즈>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이나영(엄마)이 ‘하울링’ 이후 6년 만에 선택한 ‘뷰티풀 데이즈’(윤재호 감독)는 흥행 성적을 떠나 최근의 한국 예술영화 리스트에서 주목받아 마땅할 작품 중 하나로 기록될 만하다. 끝날 때까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묘한 분위기, 그리고 인생과 가족의 얘기를 담아 전하는 메시지는 장엄하다.

2017년. 중국의 19살 조선족 젠첸(장동윤)에게 병든 아버지(오광록)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엄마를 보고 싶다”며 엄마의 사진을 내놓는다. 사진 뒤에는 엄마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주소가 적혀있다. 아버지는 14년 전 가출한 엄마의 소재를 알고 있었던 것.

한국. 바에 들어간 젠첸은 주인 겸 마담인 엄마를 한눈에 알아보지만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 기다리다 문을 닫고 귀가하는 그녀의 뒤를 쫓는다. 엄마는 수상한 미행에 동거 중인 애인(서현우)을 불러내 젠첸을 제압한다. 그러나 그의 정체를 알자 애인은 밖으로 나가고 엄마는 자고 가라고 한다.

다음날 밤 젠첸은 골목에서 볼일을 보는 애인에게 각목을 휘두른다. 그런데 나무에 못이 박혀있던 걸 몰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엔 별지장이 없단다. 엄마는 애인이 좋은 사람이니 문병을 가자고 한다. 그렇게 겉으로 화해한 뒤 젠첸은 엄마가 사준 양복 등 선물 꾸러미를 들고 귀국한다.

▲ 영화 <뷰티풀 데이즈> 스틸 이미지

젠첸은 선물 꾸러미 속에 담긴 낡은 노트 한 권을 발견하고 기숙사에 가져가 밤새워 읽는다. 엄마가 탈북해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과정, 왜 자주 가출을 했는지, 그리고 한국까지 어떻게 흘러들어오게 됐는지 힘든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아버지 앞에 나타나는데.

윤 감독은 분단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을 겪는 가족의 얘기를 담고자 한 의도를 영화 전편에 걸쳐 무겁고, 무참하게, 절망적이면서도 혼란스럽게 그리다 엄청난 반전으로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뒤 제목처럼 초월로 (향후) 아름다‘울’ 나날들을 그림으로써 마무리한다. ‘뷰티풀’은 다분히 반어법적이다.

1997년 조선족 브로커 황 사장(이유준)에 의해 중국에 온 북측 출신 엄마는 조선족 아버지와 결혼한다. 황 사장은 탈북 여성을 도와 중국인과 결혼시킨 뒤 다시 빼돌려 매춘, 마약 운반 등에 이용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왔지만 막다른 절망에 이른 엄마의 운명은 말로 표현이 힘들 정도.

이런 속사정을 잘 모르는 젠첸의 감정은 온통 원망뿐이다. 한국에서 재회한 엄마의 첫마디는 “여기 왜 왔어?”다. 그 행간의 뜻을 알 리 없는 그는 엄마가 주는 돈을 길거리에 내팽개친다. 엄마가 목욕탕 문을 열고 수건을 건네자 옷을 벗던 젠첸은 화들짝 놀라며 심한 거리감을 보인다.

▲ 영화 <뷰티풀 데이즈> 스틸 이미지

엄마가 아침밥상에서 된장찌개를 퍼주자 젠첸은 거부한다. 엄마는 “너 어릴 때 잘 먹었잖아”라고 억지로 먹이려 하고 젠첸은 숟가락을 놓고 뛰쳐나간다. 도대체 이들이 모자 사이라는 정황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오래 떨어져 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젠첸의 마음의 문이 닫혔기 때문일까?

젠첸의 “어찌 이런 데서 일해?”라는 분노에 엄마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라고 답한다. 처절했던 과거를 말할 수 없는 항변이다. 엄마는 단순히 북측을 벗어나면 나아지리라는 환각에 인생의 나침반을 황 사장에게 쥐여줌으로써 산다는 게 죽음보다 못한 표현이 되는 악연의 생에 얽혔다.

황 사장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엄마는 그에게 되돌아갔고, 성적 노리개가 됐으며, 심지어 마약 운반까지 했다.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의 인트로를 연상케 하는 혼돈스러운 조명과 포커스의 인트로는 화려하지만 처연하다 못해 처절하고, 관능적이기보다는 퇴폐성을 넘어 허무적이다. 

그런 미망의 영혼이 선택할 종착역은 환승으로밖에 다다를 수 없어 젠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도망간 것이었다. 그 고통과 엄마를 그리워하는 젠첸의 애통을 동시에 감내해야 했던 아버지는 그렇게 가족을 위해 사위어갔다. 한국에서의 엄마도 한낮의 몽유병처럼 기신기신 살아가는 인생은 마찬가지.

▲ 영화 <뷰티풀 데이즈> 스틸 이미지

젠첸이 두 눈을 홉떠 엄마와 연인을 바라보며 배신감과 원망과 냉소를 쏘아댈 때 그는 두 사람의 감정을 못 봤다. 이미 오래전 엄마는 모든 죄를 자신이 안고 가겠다고 묵비를 맹세했고, 그렇게 반성의 최선의 법칙은 자신의 무화라며 무미건조한 쳇바퀴 위에서 혼효된 변전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의 빨간색 계통의 머리와 가죽 재킷은 출신지나 데카당스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피의 메타포다. 배우의 탄탄한 연기력이 버팀목인 클로즈업이 자주 등장할 만큼 이나영의 연기력은 확실히 향상됐다. 애써 예뻐 보이려 하지 않고 캐릭터와 작품에 몰두한 결과는 매우 훌륭하고 장동윤은 ‘발견’이다.

앞서 아버지는 시간을 돌이키려다가(엄마의 시간성으로서의 또 다른 비본래적 존재자로)엄청난 실수를 했다. 그 결과 엄마는 다른 시간(공간, 다른 현존재)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엄마의 시간은 무심하게 빨랐고, 젠첸의 시간은 비참하게 더뎠다. 아버지의 시간에 대한 포기가 생기기까지.

파열음으로 스릴러적 분위기로 몰고 가는가 하면 재즈로 허무와 염세를 흩뿌리는 음악도 훌륭하다. 젠첸이 결국 된장찌개를 먹는 건 엄마의 인과율을 인정하고 상대성이론을 믿기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의 시간이 달랐던 만큼 이제 같은 시간성에 실존하자는. 104분. 12살 이상. 11월 2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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