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소녀의 세계’(안정민 감독)는 곱다, 아름답다, 숭고하다. 유명한 스타가 나오는 것도, 엄청난 제작비가 투입된 것도,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화려한 것도 아니지만 이런 저예산영화라면 여느 상업영화와 견줘도 경쟁력은 충분하다. 만듦새는 매끄럽고, 메시지는 깊고도 강렬하다.

고1 선화(노정의)는 밥상에서 어제 쓴 돈을 고백하는 검소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살지만 고3 언니 선주에게는 불친절하다. 선화의 단짝 지은(김예나)은 후배들의 우상인 고3 하남(권나라)을 짝사랑한다. 선화는 졸업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연출자 고3 수연(조수향)에게 줄리엣 역으로 캐스팅된다.

그런데 하남이 로미오 역을 맡았다. 선화는 먼발치서 동경의 눈길로만 바라봤던 하남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걸 넘어 여러 가지 도움을 주니 하루하루가 황홀하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수연의 눈길은 어쩐지 불편하다. 선화는 하남에 푹 빠져 그녀의 교실에서 수업까지 듣는다.

수연은 급우인 선주가 선화의 언니인 걸 알게 된다. 사실 선주는 수연을 짝사랑해 그녀로부터 ‘스토커’로 불려왔다. 선화에게 호감을 품은 수연은 어느 날 선주와 함께 집에 놀러 오고, 마침 귀가한 선화를 반갑게 맞이하지만 선주는 선화를 따돌린다. 수연의 얼굴이 야릇한 서운함으로 물든다.

▲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연극에 캐스팅된 1학년들은 구심점인 하남이 없으면 연습이 안 된다고 불평을 하고, 이에 수연은 히스테리에 가까운 예민한 반응을 보이더니 연습 중 하남과 선화가 캐릭터에 몰입했는지, 서로 상대에 푹 빠졌는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하자 그만 폭발해 하남과 크게 다투는데.

이성 교제가 자유로워진 지금이야 줄었지만 폐쇄적이었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이런 풍경은 흔했었다. 이선희나 이상은 등 여가수들에게 여학생 부대가 열렬히 환호했던 게 증거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억압된 사회상과는 관계없이 소녀가 어른의 단계로 나아가는 순수한 내면세계를 그린다.

그럼에도 영화는 다분히 아날로그적 정서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1인 방송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시대에 셰익스피어 연극이 가장 큰 소재다. 사진반 활동도 열심인 선화는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 카메라의 대명사 격인 FM2를 애용하고 돼지 저금통에 동전을 채워 넣는다.

연극반원들은 학교 운동장의 텐트에서 합숙하고 양은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 먹는다. 휴대전화를 보기 힘들고 컴퓨터는 딱 한 신에 등장한다. 하남은 항상 책을 읽고 에너지 음료수 대신 포카리 스웨트만 마시며 낡은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 선화를 짝사랑하는 남자친구의 취미는 스트리트 파이터 게임.

▲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이 모든 목가적인 풍경은 친근한 한옥 및 아름다운 시골 풍경을 품고 파스텔 톤의 동화처럼 펼쳐진다. 주제가 소녀들의 소녀들을 향한 사랑으로 집중되는 건 천박하고 편협한 시각의 동성애와는 차원이 다르다. 사랑의 본질주의와 소녀들의 성장과정의 시뮬라시옹(보드리야르)이다.

선화는 하남의 손을 잡아본 뒤 “똑같은 손인데 남자 손과 여자 손은 왜 다를까?”라고 의아해한다. 목욕탕에서 엄마의 등을 밀어주면서도 “같은 여자인데 엄마는 몸이 다르다”라고 말한다. 또한 “장미를 뭐라 부르든 향기는 그대로”라고 주장한다. (사랑의)본질의 중요성과 남녀 혹은 음양의 조화다.

그녀는 “왜 요즘 사람들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말하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사랑의 감정은 똑같은데. 낭만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탄식한다. 그녀가 “내 첫사랑은 로미오”라고 하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진짜 로미오일 리 없고, 그렇다고 하남이란 특정의 대상화도 아니다.

선화의 첫  연습 신을 잡기 직전 카메라가 훑는 똑같은 무늬가 반복되는 유리벽과 나란히 놓인 책상들은 시뮬라크르다. 즉 ‘로미오=하남=첫사랑’이다. 꼬집어 하남이 아니라 하나의 형상화된 시뮬라시옹 작업을 통한 이마주(베르그송)인 것이다. 남녀의 조화와 경계를 초월한 숭고한 사랑의 범주화.

▲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각종 사랑의 종류를 적은 미장센도 이를 뒷받침한다. ‘Blind love’는 맹목적 사랑, 그런 사랑에 눈먼 사람 등을 뜻한다. ‘Platonic love’는 플라톤의 의도와 달리 정신적인 사랑으로 의미화됐다. 연출 의도는 이 두 단어로 집중돼 “사랑은 동그랗기에 세모와 네모 등을 모두 감싸 안는다”라는 테제로 완결된다.

선화가 인트로에서 우주복을 입고 척박한 행성 같은 곳을 헤매다가 아웃트로에서 대자연 속의 장엄한 폭포 앞에서 우주복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는 수미상관은 하남과 수연을 겪으면서 한 뼘 성장해 여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은유다. 그녀는 “사랑은 우주와 같다”라며 “우주로”를 자주 외친다.

우주는 성장통을 겪은 후 정신세계가 훌쩍 자란 뒤의 내면세계를 뜻한다. 선화가 버스만 타면 졸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도 성장통의 하나다. 처음에 어색해하던 하남이 나중에 선화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우주로”를 합창하는 것은 서로의 시뮬라시옹을 통한 일취월장이다.

후반부에 “‘내일 봐’ 저는 이 말이 좋아요”라는 선화의 고백은 “사는 게 재미가 없다”던 지은의 푸념의 매조짐이다. 청소년(젊은이)들에겐 내일이 있기에 오늘은 지치고 어려울지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이란. 왜? “이별은 달콤한 슬픔”이니까. 104분. 12살 이상. 11월 2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