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종점에 이르러 어떤 인생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JP는 2018년 6월23일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인생의 종착역을 미리 짐작을 했는지 세상과 하직하기 직전 봄 인간적 소회를 담은 ‘남아 있는 그들에게’라는 명상의 글을 책으로 펴냈다. 머리말에 “저의 40여년 정치인생은 2004년 정계은퇴로 마무리되었으며 이제 아흔을 훌쩍 넘은 저의 삶도 막을 내릴 것입니다. 종점에 이르러 어떤 인생이 가치있는 삶일까요. 자신의 남은 삶의 에너지를 모두 전소시키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내 인생의 마지막은 종일 세상을 덮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태양이고 싶었다.”고 지나온 삶의 여정을 뒤돌아본다.

그러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살았던 부인에 대한 절절한 심정을 담은 사모곡을 부른다. 다음의 그의 회상이다.

아내는 2014년 9월척추협착증으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저는 2008년 뇌졸증으로 쓰러져 팔과 다리가 불편했지만 매일 휠체어에 앉아서나마 아내의 병상을 지켰습니다. 딸 예리가 자꾸 집에 가라고 했지만 저는 아내 곁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2015년 2월15일 결혼64주년을 함께 보내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저는 아내의 임종이 다가왔음을 직감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물리고 아내와 단둘이 작별인사를 나눴습니다. 마지막 입맞춤했고 64년 전 아내에게 선물했던 결혼반지를 목에 걸어줬습니다. 아내에게 한 마지막 말은 “여보 멀지 않은 장래에 갈테니까 외로워 말고 잘 쉬어요.”였습니다. 아내가 마지막 눈을 감으며 내 곁을 떠나갔을 때 저는 그야말로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내는 정치를 하며 여러 번 부침을 겪은 제 곁에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한결같이 보살피고 머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 그런 그림자 내조를 해왔습니다. 드골 대통령의 부인 이본느 여사처럼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저는 아내의 생일때마다 마음을 담아 직접 글씨로 축하편지를 썼습니다. 선물을 사주기도 했지만 한 획 한 획 정성을 담아 편지를 썼습니다. 아내는 편지를 버리지 않고 표구를 해서 모아뒀습니다.

박정희 집에 국수 먹으러 갔다 처음 만나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아내는 경북 선산군에서 태어나 숙명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아내를 소개해준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서울 용산에서였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 문관이던 박정희 소령은 용산에 숙소를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점심때 국수를 좋아하던 박정희 소령이 국수나 먹으러 가자며 숙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는 박 소령의 조카딸이 와 있었고 식사시중을 들어줬습니다.

6.25전쟁 때문에 육군본부가 대구에 있을 때 내가 소속되어 있던 정보국 사람들은 ‘영남여관’을 숙소로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박정희는 전선에 나가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김종필을 찾으라는 당부와 함께 영남여관 옆 동창집에 아내를 부탁했습니다. 어느 날 구미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저를 찾아와 “박영옥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신음하고 있다.” 고 했습니다. 서둘러 가보니 용산에서 만났던 여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저는 목침대를 가져와 그녀를 눕히고 의사를 수배해서 주사를 놓게 했습니다. 그녀가 고마운 마음에 비스킷과 빵 등 미국 야전식을 대접하면서 인연이 이어졌고 자연스레 서로 호감을 키워나갔습니다.

1.4후퇴 직후 대구에 있어야 할 그녀가 서울 육군본부 청사 앞에 왔습니다. 너무 놀라 어떻게 왔느냐고 물었더니 “김 중위님 연락이 끊겨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려고 화물열차를 타고 왔어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때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결혼은 하고 봐야겠다는 심산이었지요. 박 대통령이 연병장을 걸으면서 “내 조카딸 데려갈 생각 없어?”라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 흔쾌히 “본인이 좋다면 데려가겠습니다.”고 수락했습니다. 그 약속이 결실을 맺었습니다.

박 대통령 JP결혼 선물로 황소 한 마리 보내와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1951년 2월15일 그녀와 저는 대구의 한 교회에서 결혼했습니다. 아내 나이 22살, 내 나이 25살 때였습니다. 결혼 당시 저는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한 마디만 더(One More Word)’의 한 구절을 아내에게 들려줬습니다.

“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
“한 번, 단 한 번,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

아내의 작은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전방에 있을 때여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트럭을 한 대 보내 축하 편지와 잔치에 쓸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보내왔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얼마 안돼 미국 보병학교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아내와 저는 상당기간 떨어져 있었고 귀국후에는 전쟁 때문에 생이별한 시간이 많았습니다. 육영수 여사는 제게 처 숙모입니다. 우리 부부는 신혼초인 1951년 대구에서 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함께 살았는데 아내 곁에 육영수 여사가 있어서 임신 9개월의 아내를 두고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에서 6개월간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온 것이 1952년 4월이었습니다. 귀국후 넉달쯤 있다가 저는 전방으로 가고 싶다고 했고 10월30일 정보참모 겸 수색중대장으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휴전협정을 앞두고 모든 전선에서 조금이라도 영토를 더 점령하기 위해 고지 쟁탈전이 벌어질 때 중공군이 포위작전을 펼쳤습니다. 저는 부대원들을 데리고 중공군을 뒤에서 덮쳤습니다. 그렇게 겨우 퇴로가 열렸고 우리 부대원들은 사지를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여기 오는 길에 춘천 시장통에서 우연히 애를 업고 있는 영옥이를 만났어. 자네가 중공군과 싸우고 있는데 죽을 거라는 소문이 나서 ‘같이 죽으러 왔다’며 남편을 찾아왔다고 했대.”

소속 연대장은 고맙게도 자기 지프에 쌀 한가마니를 실어주며 아내를 만나러 가보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예리를 업고 그 위에 가마니 거적을 바람막이 삼아 덮고 있었습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군수용 화물열차를 타고, 서울에서 춘천까지는 군용 트럭을 얻어타며 아내는 다시 한 번 전쟁터 한가운데 있던 저를 만나러 온 것이었습니다. 엉엉 우는 아내와 일주일을 보낸 뒤 대구로 내려보냈습니다.(‘남아 있는 그대들에게’중에서)

영화 ‘러브스토리’의 첫 대사는 “우리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할까.”이다. 이 한마디가 얼마만큼 소중하게 사랑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또한 “사랑은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원망하지 않고 따지지 않고 저렇게 다른 이유로 돌려서 표현할 수 있는 현명한 여자가 어디 있을까” 등 평범하지만 가슴 속 깊이 파고드는 그런 대사들이 많다. 얼핏 보아도 JP가 부인을 향한 사랑과 맏음이 어떠했지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은 JP를 두고 ‘낭만의 정치가’라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10대때 영웅들의 파란만장한 전기를 읽고는 어린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격과 미래에 대한 부푼 꿈 때문에 잠못 이룬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중학생때였다. 디즈레일리의 명언 중에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라든가 정열의 혁명아 나폴레옹의 “천재란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덩이다.”라는 글귀는 그의 인생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인생은 짧다 시시하게 굴지 마라”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JP의 회고는 계속된다. 그가 독서에 빠져든 것은 초등학교 4,5학년때부터이다. ‘나폴레옹전’ ‘플루타크 영웅전’같은 위인전을 비롯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는 기쿠치 칸(菊池冠)의 ‘제2의 키스’를 몰래 읽다가 중학교 상급생이던 형에게 책을 빼앗기고 호되게 기합을 받기도 했다. 이후 연애소설은 가족들의 눈을 피해가며 탐독했다. 중학교에 가서는 ‘일야일권독파주의’를 원칙으로 삼았다. 하룻밤에 책 한 권을 독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내가 인생을 알게 된 것은 사람들과 접촉한 결과가 아니라 책과 접촉한 결과다.”라고 했다. 독서를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와 생각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또 책을 많이 읽으려면 책을 항상 손이 닿기 쉬운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가 침대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들기 직전까지 독서하는 습관을 가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90 나이가 넘어도 새벽3시쯤 깨면 한바탕을 책을 읽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낮에도 틈만 나면 책과 신문을 읽었다. 책을 읽지 않는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곁에 두어야 찬란히 빛나는 만드는 무기로 쓸 수 있다고 평소 말하곤 했다.

그는 또 음악을 좋아해서 중학생부터 여러 악기를 익혔다.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 학교 선생한테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고 중학교 1학년때 4학년 선배가 만돌린을 기가막히게 연주해 선배한테 만돌린을 배웠다. 아코디언도 그가 즐겨 연주하는 악기 중 하나이다. 1967년 7월 공화당 의장으로 있을 때 금성방직 안양공장 잔디밭에서 공화당 단합대회를 한 적이 있는데 이때 가수 이미자씨가 ‘섬마을 선생님’을 불렀는데 그가 아코디언으로 반주했다.

자유민주연합 총재로 있던 1997년 9월 SBS ‘대통령 후보와 함께’라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가수 노사연씨가 부르는 ‘만남’이라는 노래에 맞춰 악단 몇 명과 함께 아코디언을 연주했을 정도였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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