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국가부도의 날’(최국희 감독)은 김영삼 정권의 말미인 1997년 말의 불과 며칠을 다룬다. 정부의 경제 호황이라는 선전과 달리 나라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야욕과 소신이 다투는 절체절명의 플롯이 손에 땀이 흥건하게 만든다.

공권력과 재벌 등의 카르텔로 나라 경제가 엉망이 돼 외국 자본이 속속 빠져나가고, 외국 언론은 한국 경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이 이런 현황을 행장에게 보고하자 청와대 경제수석은 국가부도 사태를 막겠다며 부랴부랴 비공개 대책팀을 꾸린다.

대책팀의 사실상 실무 핵심 인물은 시현과 하버드 출신의 재정국 차관(조우진)이다. 그런데 시현과 차관의 시각과 생각은 완전히 정반대라 사사건건 부딪친다. 일선 은행을 헤집으며 경제 현황을 피부로 체득한 시현은 경제 전문가로서 국민을 위한 사명감에 투철하지만 차관은 위기를 기회로 여긴다.

측근의 재벌 등 자본과 결탁해 이번 사태를 통해 경제구조의 새 판을 짜려는 것. 즉 틈만 나면 파업을 일삼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깨뜨려 오직 자본가만을 위한 나라로 만들려 한다. 그는 애초부터 목표였던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밀어붙이는데 시현이 반대하자 경제수석이 그녀의 뜻을 따른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이미지

그러자 곧바로 경제수석이 교체된다. 새 수석 김찬수는 차관의 하버드 대학교 선배다. IMF 총재(뱅상 카젤)가 비밀리에 입국하고 찬수는 IMF에 대한 소문을 묻는 언론에 “절대 아니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릇 공장 사장 갑수(허준호)는 중간 유통업자에게 어음을 받고 미도파 백화점에 납품을 결정한다.

하지만 갑자기 재벌들이 줄도산을 하는 와중에 미도파 백화점도 파산 신청을 함으로써 빚더미에 앉는다. 제2금융권 회사에 다니던 윤정학(유아인)은 누구보다 빨리 국가의 경제 위기를 파악하고 과감하게 사표를 던진다. 난파하는 배에서 구조를 기다리지 말고 밖에 나가 더 큰 배를 사자는 작전인데.

한마디로 근래 손꼽을 만한 지적인 스릴러다. 쉽게 표현하자면 경제 스릴러고 심리 스릴러다. 1997년을 아프게 겪어본 대다수 성인들에겐 극강의 호러고, 잘 모르는 젊은이들에겐 정치적 관심을 밑바탕으로 한 경제 개념을 확고하게 심어줄 수 있는 막강의 시나리오다. 한 국민으로서의 필독서다.

시현과 차관의 대립 공간, 갑수의 서민적 피해 공간, 그리고 다수의 국민이 절체절명의 공포심을 느끼는 위기를 기회라 삼는 정학과 졸부들의 투기 파티 공간 등 세 곳으로 교차 편집된 게 큰 틀이다. 갑수는 지극히 평범한 서민이고, 매우 선량한 국민이지만 국가와 거대 자본에 의해 철저하게 부서진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이미지

정학 역시 흔한 샐러리맨이지만 경제와 정치에 남다른 감각과 판단 능력을 지녔다는 데서 다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발상 역시 그렇다. 그는 소수의 졸부들과 함께 달러,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해 떼돈을 번다. IMF 당시 “이대로”를 외쳤던 졸부들과 그들에 기생했던 투기꾼들의 형상화다.

그럼에도 그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때문에 영화 중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다. 재벌 2세의 돈은 받지만 그에게 따끔하게 주먹질로 충고할 줄 아는 마지막 인간미는 지킨다. 크게 성공한 그들이 단란 주점에서 술을 마실 때 재벌 2세가 부르는 ‘날개’와 정학의 허허로운 웃음은 아이러니의 거울이다.

1997년 봄 발표된 언타이틀의 ‘날개’는 구속으로 억압받는 ‘흙수저’들이 자유를 찾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정학은 경제성장이라는 대의명분 뒤에서 재벌의 배를 불리면서 각종 데마고기와 프로파간다로 정경유착을 가린 채 정권을 유지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만 그게 옳지 않다는 건 인정한다.

시현은 지나치게 정형화된 캐릭터여서 오히려 덜 현실적이다. 실제 이런 인물들이 사회의 선두에 최소 정예라도 포진돼있었다면, 그런 위기를 맞았을까, 현재에도 그런 배치가 있다면 이런 경제적 추락이 발생했을까, 의문이 들 만큼 반듯한 소신과 신념의 표상이다. 후반 김혜수의 오열 신은 굉장하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스틸 이미지

오 회장과 조 상무의 ‘내부자들’에 이어 신 경제수석과 차관으로 다시 만난 김홍파와 조우진은 대표 캐릭터 하나씩을 더 구축했다. 특히 세 치 혀로 수천만 명의 서민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짓거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대는 인물을 구축한 조우진의 무르익은 캐릭터 설정 능력과 소화력은 압권이다.

거리의 ‘오뎅끼데스까’ 간판의 미장센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당시 한국인들이 잘 지낼 리 만무했다. 실제 한때 유행했던 이 어묵 주점 간판은 정권과 자본의 도그마(독단)가 압사시킨 국민의 소박한 독사(의견)를 은유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선의의 거짓말 Vs 악의적 거짓말’과도 연결된다.

이념과 개념을 이분법적 방식으로 가늠한다면 거짓말은 분명히 나쁘다. 하지만 이분법은 지엽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일 위험성이 높다. 차관과 시현이 이 거짓말이 선의일 경우와 악의일 경우를 다툴 때 정학이 “내가 속을 줄 알아? 안 속아”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건 정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항상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라는 마지막 말은 이 영화의 존재의 존엄성과 제작의 당위성을 웅변한다. 내내 무겁고 어두워 아프게 만들지만 의외의 코미디가 포진된 시나리오가 매우 탄탄해 지루할 틈이 없다. 114분. 12살 이상. 11월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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