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다영씨’는 ‘델타 보이즈’ ‘튼튼이의 모험’ 등으로 독립영화계에서 돋보이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 고봉수 감독이 연출, 편집, 촬영, 원안/각색의 1인4역으로 완성한 무성흑백영화다. 대사 없이 최소한의 음향효과만 삽입하고, 조연들의 다소 과장된 연기로 포장함으로써 드라마를 극대화한다.

튼튼배송 직원 민재(신민재)는 배송업무 중 알게 된 삼진물산 말단 직원 다영(이호정)을 짝사랑한다. 물건을 배송할 때마다 마주치는 그녀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하다. 생각 끝에 그는 튼튼배송에 사직서를 낸 뒤 삼진물산에 이력서를 제출한다. 희망급여 50만 원이란 문구에 부장은 합격시킨다.

회사는 사장, 부장, 팀장, 대리, 평사원, 사장 딸 하람(강하람), 그리고 다영의 순서로 서열이 정해져있지만 사실상 하람이 2인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하람은 다영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여자의 적은 여자?) 전 직원은 앞다퉈 하람에게 아부하는데 특히 대놓고 다영을 괴롭히고 따돌린다.

▲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새로 서열 꼴찌가 된 민재는 제일 먼저 출근해 사무실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성심성의껏 잡일을 마다않고 소화해낸다. 회식 날 전 직원이 일부러 다영만 뺀 채 민재를 데려가지만 그는 슬며시 빠져 사무실로 간다. 홀로 야근 중이던 다영이 잠들어있는 걸 보고 밤새워 그녀의 밀린 업무를 해준다.

두 사람이 동병상련으로 상부상조하는 걸 본 전 직원은 따돌림의 대상을 민재로 바꾸고, 회식 때 다영을 불러낸다. 찜찜하지만 그래도 이제 ‘제도권’에 들어갔다는 마음에 들떠 그들을 따라나선 다영은 그러나 다시 예전처럼 따돌림을 당하자 구멍가게 앞에서 홀로 캔 맥주를 마시며 눈물을 흘리는데.

소기업을 무대로 벌어지는 국지적 얘기지만 결코 지엽적이지 않은 우리 사회와 나라의 현실이다. 사장이 부장을 혼내자 부장은 팀장을 때리고, 팀장은 대리를 무차별 폭행한다. 이 폭력의 연쇄작용을 목격한 서열 끝의 다영이 느끼는 공포는 어마어마하다.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건 직장-內-잔존.

삼진물산의 ‘주차금지 견인조치’라는 미장센은 다영을 향한 민재의 짝사랑에 대한 경고문이다. 극도의 산업화 사회에서 개인의 주체성이 말살된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 민재가 배송 때 승용차의 경적에 놀라 떨어뜨린 배송품이 파손됐음에도 운전자가 화를 내는 적반하장의 시퀀스는 사회의 반영.

▲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조금 늦게 배송받았다고 고등학생이 손가락으로 민재를 부른 뒤 야단치는 시퀀스는 재벌가 초등학생이 늙수그레한 자가용 운전사에게 ‘갑질’한 현실이다. 시간이 흐르자 ‘주차금지’ 경고문 앞에는 버젓이 차 한 대가 주차돼있다. 사회가 개개인의 사랑의 감정마저도 제어한다는 무시무시한 메타포.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형식만 보면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의 체취가 강하게 느껴지지만 내용적으로는 그리스의 비극과 희극을 합친 뉘앙스가 전체를 지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관객에게 공포와 연민을 느끼게 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통해 감정을 정화시키는 기능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니체는 비극을 디오니소스(일탈, 초월)와 아폴론(규칙, 정도)의 대립으로 봤다. 민재와 다영이 각각 상사와 현실에 공포를 느낌으로써 서로에 대한 진한 페이소스로 상대방을 감싸는데 그 근원은 민재의 다영을 향한 파토스고, 그걸 깨달아가는 다영의 이데아는 현실을 초월하는 디오니소스적으로 흐른다.

▲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또한 희극이 추구하는 사르카즘(풍자)으로 가득하다. 사장까지 8명에 불과한 소기업에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작당모의와 회식을 통해 대놓고 배제하는 ‘이지메’의 대상을 만드는 건 사회 곳곳에 실제 만연돼있음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장치다. 계급화된 사회에서의 개개인의 주체성과 정체성의 말살이다.

사장과 하림을 제외하면 모두 보잘것없는 소시민이다. 그러나 그 작은 조직에서 생존과 더불어 작은 이권 하나 더 얻겠다고 권력에 굴종과 복종의 아부를 해대고, 부하 직원에겐 가차 없는 폭력으로 추종을 이끌어내는 구조는 서열화된 현실을 정면으로 꼬집기에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말만 민주주의일 뿐 여전히 수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 및 국가가 만든 학력, 학연, 혈연, 지연 등의 커넥션부터 아집과 외모지상주의 등을 풍자하는 통쾌함! 예외 없는 ‘고봉수 사단’의 얼굴들이 반갑고, 그들의 연기 솜씨는 무성흑백영화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쏠쏠한 재미를 선사한다.

특히 최대한 절약했지만 음향효과가 매우 뛰어나다. 피아노 하나로 러닝타임 내내 지속되는 배경음악은 미뉴에트부터 행진곡까지, 또 승리를 노래하는 아폴론 찬가부터 황홀경을 숭배하는 디오니소스의 주신 찬가까지, 또 랩소디와 레퀴엠까지 넘나드는 형식이다. 61분. 12살 이상. 12월 6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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