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국 개국하다

이러한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아 우리나라 최초로 TV방송국 개국에 앞장선다. 그러니까 1961년 여름 오재경 공보부장관을 만나 TV방송국 설립계획을 논의했다. 일본에 갔을 때 집집마다 TV안테나 있는 것이 부러웠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환을 마련해 연내에 남산 기슭에 TV방송국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장관을 불러 중앙정보부가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해 갖고 있던 대남공작금 20여만달러로 필요한 기자재를 미국에서 주문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1961년 12월31일 저녁 6시 첫 전파를 발사했다. 아울러 관현악단 40명, 합창단 35명으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종합음악예술단체인 ‘예그린악단’을 만들었다. 나라를 재건하려면 정치와 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신문화를 살리는 문화예술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예그린악단을 만든 데에는 미국 보병학교 유학시절의 경험도 한몫했다. 뉴욕 록펠러센터의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봤던 악단의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당시 전쟁 중이던 우리나라를 떠올리며 ‘우리도 저런 거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하나 만들어 우리나라 전통악기와 합주해보자는 구상을 했고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미래를 열어나가자는 뜻에서 ‘예그린’이라고 했다. 1968년 공화당을 떠나면서 예그린은 해체됐지만 다행히 국립가무단, 시립가무단으로 이어졌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은 정치를 예술이라고 했습니다. 예술의 경지까지 정치를 끌어올리려 했으니 얼마나 장하고 위대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진 뒤 모든 정치가 아름다움의 세계를 동경하고 지향한다면 가장 적은 수의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시는 이상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책 ‘남아 있는 그들에게’에서 말한다. 또 그는 “정치에도 예술에도 다정다감한 흐름이 필요하다. 다정다감이 없으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특이한 발상도 나올 수 없고 창조적인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정치인으로 살아왔지만 원래 목표는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교생실습을 하면서 젊은 혈기로 조선 사람을 무시하는 일본인 교장을 구타한 죄로, 헌병대에 잡혀가서 일주일동안 차가운 감방에서 이에 물어뜯기며 지내야 했고 그 과정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생사를 오락가락 하기도 했다.

1945년 4월, 대전사범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도 충청남도 벽지의 바닷가 마을인 보령군 천북면 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천북 옆에 있는 오천은 부친이 스무살 때 측량 기사로 일하기 시작한 곳. 아버지는 동양척식회사가 부당하게 탈취한 농민들의 땅을 측량해서 주인들에게 되찾아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오천에는 아버지를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그는 해방이 된 조국에서 초등하교 교사로만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1946년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부에 응시해 합격했다. 영국 이튼 스쿨같은 멋진 학교를 만들어 해방된 우리 조국을 이끌어갈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열망에서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것이다.

선생님에서 정치인으로

▲ 사진=ktv 화면 캡처

그러다가 대학 2학년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세가 기울면서 학비가 없어 대학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보병으로 입대해 잠시 근무하다가 1949년 1월 육사 8기생 추가모집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했다. 졸업식이 열린 1949년 5월 1년만에 어머니를 만났다. 대학을 그만두고 군에 입대하면서 집에 연락을 끊었고 오래만에 만난 어머니는 연신 “살아 있었구나!”하면서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군인이 되었고 5.16을 거쳐 정치인이 됐다.

그는 살아오면서 세 번을 울었다고 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울었고, 201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날 때 울었다. 그리고 1980년 6월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울었다. 보안사에서의 울음은 꿈과 야망을 빼앗겼기에 분노와 허탈, 회한과 좌절이 뒤범벅이 된 눈물이었다.

보안사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죄송합니다. 참으로 못할 짓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하고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자 JP는 “당신이 2인자인 것 같은데 권력을 장악한 1인자는 2인자를 소외시키거나 무력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서 2인자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해줬다.

“첫째, 절대로 1인자를 넘보지 마라. 비굴할 정도는 안되겠지만 품격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때 2인자다운 논리가 서야 한다. 둘째, 있는 성의를 다해 일관되게 1인자를 보좌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라. 조금이라도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마라. 때가 올 때까지 1인자를 잘 보좌해야 한다.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게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영원한 2인자 JP의 삶, 결코 쉽지 않은 인생 역정의 길을 걸어왔다. 1인자라는 것은 언젠가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고독하기 마련이다. 반면 2인자는 마음이 여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고독한 1인자에게 여러 가지 견제와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인내심이 대단해야 한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JP는 평생 인내하는 삶을 살았다. 한 정치인이 나이들은 JP에게 지는 해로 비유하자 “지기 전에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고 촌철살인같은 말로 응수했다. 종착역에 거의 다다를 즈음에는 “가족들과 함께 눕다.”고 싶다고 말해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모든 ‘허업’을 뒤로 한 채.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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