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베일리 어게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개 같은 내 인생’, ‘길버트 그레이프’ 등의 라세 할스트롬의 신작 ‘베일리 어게인’은 원제 ‘A dog's purpose’에서 보듯 개가 인간의 삶에 주는 의미가 앞선 주제다. 애견인이라면 이유 없이 미소가 번질 테고, 생활에 찌든 사람이라면 한 번쯤 삶을 되돌아보게 될 만큼 유쾌하고 따뜻하며 아름답다.

어린 레드 리트리버 베일리는 한 불량배에게 붙잡혀 차 안에 갇힌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말라 탈진한 그를 소년 이든이 발견하고, 그의 엄마 엘리자베스가 창문을 깨 구해준다. 사내 최고 우수판매사원인 아버지 짐은 지저분해진다며 베일리를 극구 반대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설득에 허락하고 만다.

베일리는 때론 말썽을 부려 짐의 부아를 돋움으로써 이든을 곤란하게 만들긴 하지만 이든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다. 수년 후 알코올중독자가 된 짐은 엘리자베스와 헤어진다. 18살의 이든은 베일리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여자친구 한나와 사랑에 빠지고 미식축구 장학생으로 명문대 입학을 앞둔다.

이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고 술에 취한 짐이 나타나 소란을 피운다. 이든은 이를 보고 놀리는 동창 토드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날 밤 토드는 이든의 집안에 폭죽을 던지고 그게 큰 화재로 번진다. 2층 창문을 통해 엄마와 베일리를 내보낸 뒤 탈출하려던 이든은 한쪽 다리를 크게 다친다.

▲ 영화 <베일리 어게인> 스틸 이미지

절망에 빠진 이든은 한나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얼마 후 이든은 노쇠한 베일리의 죽음을 본다. 그 후 베일리는 셰퍼드, 웰시코기, 세인트버나드 등으로 계속 환생한다. 금세 세인트버나드 성견이 되자 주인은 그를 거리에 유기하고,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그는 익숙한 냄새를 맡게 되는데.

개처럼 세상에 피투(던져진)된 한 소년이 주변의 도움으로 기투(이해)의 인생을 깨닫게 되는 따뜻하고 눈물겨운 ‘개 같은 내 인생’의 할스트롬의 사람을 웃기고 울리는 솜씨는 여전히 녹슬지 않았다. 카메라는 베일리, 이든, 그리고 감독(혹은 관객이거나 신)의 세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아기자기하고 포근한 가족영화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할스트롬이 누구인가? 불교의 인연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튼튼한 뼈대로 갖추고 있다. 영화는 “삶의 이유는 뭔가? 내가 태어난 이유는? 삶의 목적은 뭘까? 매일매일이 즐겁다면 그게 목적일까?”라는 베일리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난 누구고, 여긴 어디며, 어디로 가고 있나?’는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대상을 자연에서 인간과 사회로 바꾼 이래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유사건이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고뇌에 진지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할스트롬답게 그런 인간보다 나은(?) 개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풍자와 유머!

▲ 영화 <베일리 어게인> 스틸 이미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살겠다고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것과 달리 베일리는 매번 죽을 때마다 평온하다. 환생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하이데거‘적’ 시선 덕분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끝이 아닌 본래적이거나 현존할 존재자의 또 다른 세계적 존재로 봤다.

그래서 수컷 리트리버였던 베일리는 암컷 경찰견 엘리, 수컷 웰시코기 티노, 수컷 세인트버나드 와플스 등 자꾸 다른 존재자로 바뀌는 것이다. 비록 외형(견종)은 바뀌었지만 항상 자신이 베일리임을 잊지 않는 그는 자신에게 정체성을 준 사람에게 본래적 정체성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유신론과의 결합에 불교에서 환생과 인연을 빌렸다. 그가 만나는 주인들은 모두 착하지만 결여된 존재들이다. 이든은 고집이 세서 남에게 상처를 잘 준다. 엘리의 주인 카를로스(히스패닉)는 아내를 잃고(헤어졌거나) 홀로 고독을 껌 씹듯 산다. 티노의 주인 마야(흑인)는 학교에서 ‘왕따’다.

이렇게 부족한 사람들에게 베일리‘들’은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자 친구가 된다. ‘개 같은 내 인생’의 외로운 잉마르의 곁에 삶의 동기를 주는 여자친구 샤가와 쉼터의 지붕을 수리해 주는 프란슨이 있듯.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이 그렇듯 사람과 애완동물조차도 인연으로 맺어진다는.

▲ 영화 <베일리 어게인> 스틸 이미지

세상에 우연은 없다고, 필연이라는 인연론과 인과율은 마지막에서 벅찬 감동과 힘찬 울림으로 관객들의 콧등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베일리는 “최악의 악몽은 혼자가 되는 것”이라고 독백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사람에게 외로움은 최악의 재앙이란 뜻도 담고 있다. 베일리의 말이다.

배경음악 선곡도 기지가 돋보인다. 이든이 어린 시절 온 식구가 나들이를 갈 땐 흥겨운 컨트리를, 성장한 이든이 한나와 베일리를 태우고 드라이브할 때는 끈끈한 소울을 삽입한 재치. 이든과 한나가 “이제 여름이 다 갔다"라고 말할 땐 사이먼&가펑클의 ‘April come she will’을 끼워 넣는 암시.

4월에 와 8월에 죽는 그녀, 그리고 9월에 그 사랑을 망각하는 나. 인생의 물리적 시간을 말한다. 마야와의 만남 때 나오는 아하의 ‘Take on me’의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후회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가사는 와플스의 “아무 데도 간 적 없고, 논 적도 없다"라는 푸념과 연결된다.

이든이 베일리에게 보스독이란 별명을 지어준 건 “누가 인생의 주인이냐"라는 우리 모두의 질문에 대한 답인 주인의식이다. 또 “개로 살며 깨달은 건 남에게 도움도 주고 그저 이 순간을 즐겁게 사는 게 삶이라는 것”이라는 베일리의 철학적 테제다. 올해의 필독서 중 하나다. 100분. 전체. 상영 중.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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