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지난달 29일 개봉된 ‘소녀의 세계’(안정민 감독)와 오는 6일 개봉되는 ‘다영씨’(고봉수 감독)는 사랑을 소재로 하기에 멜로 영화가 점점 사라져가는 극장가의 단비 같은 작품이라는 관객들의 반가움과 기대를 받고 있다. 아무리 저예산 독립영화라지만 왜 하필 고색창연한 ‘순수한’ 사랑일까?

‘소녀의 세계’의 무대는 한 여자고등학교 연극반. 1학년 선화(노정의)와 단짝 지은은 교내 우상인 3학년 하남(권나라)을 우러러본다. 선화 언니 3학년 선주는 급우 수연(조수향)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 교내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연출자 수연은 하남과 선화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한다.

하남과 선화는 연습실 밖에서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무대를 가리지 않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이로 발전하고, 이를 보는 수연의 감정은 격정적인 불안과 초조함에 휩싸인다.  그렇게 소녀들은 한차례 거센 파도 같은 감정의 출렁임이 요동쳤다 썰물처럼 사라진 뒤 평안을 되찾음으로써 한 뼘 성장한다.

‘다영씨’는 전 직원 8명에 사장의 젊은 딸 하람(강하람)이 사실상 서열 2인자인 한 작은 회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말단의 다영(이호정)과 민재(신민재)의 동병상련의 사랑 얘기다. 배송업무 중 알게 된 다영을 짝사랑하던 민재는 그녀가 외톨이인 것을 알고 택배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이제 막 입사했다.

▲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하람이 이유 없이 다영을 미워하고, 하람에게 아부하려는 전 직원은 위력으로 나약한 다영의 자존감을 말살한다. 민재는 그런 다영의 위로가 되기 위해 입사했고, 그런 행동에 화난 나머지 사람들은 이제 민재까지 따돌린다. 민재는 그렇건 말건 다영을 향한 희생을 계속하고, 다영도 그걸 알아준다.

사랑이란 과연 뭘까? 그리스신화는 사람은 원래 남녀, 남남, 여여가 한 몸인 구체형으로 완벽한 체력을 지녔었는데 이에 자만심이 극도에 달하자 분노한 제우스에 의해 둘로 갈라졌기에 평생 짝을 찾아 헤매는 것이라 했다. 플라톤은 이를 인정하며 플라토닉 러브인 철학적 에로스를 강조했다.

즉 참된 사랑이란 육체적 욕망이나 종족보존의 동물적 본능에 호적을 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지혜와 진리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필리아(우애)적인 정신적 사랑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원적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성적 욕구를 배제한다면 동성애도 순수하고 지적인, 미의 사랑의 경지로 봤다.

제우스만큼 바람둥이인 아프로디테는 헤르메스와 바람을 피워 미소년 헤르마프로디토스를 낳았다. 15살 된 그를 짝사랑한 물의 요정 살마키스가 자신의 곁에 영원히 묶어두기 위해 합체하면서 ‘개념이 의인화된 신’으로서의 자웅동체가 됐다.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 자신은 불행해했다. 

▲ 영화 <소녀의 세계> 스틸 이미지

그리스신화가 완벽한 구체형 인간과 헤르마프로디토스에 대해 불행이란 멍에를 씌운 데 대해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플라톤을 대입하면 최소한 ‘소녀의 세계’와 ‘다영씨’에 대해서만큼은 설명이 가능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인간은 불완전한 사회적 동물이라 ‘친구’가 필요하다는 개념의 의인화다.

그 친구는 일반적인 동성 친구일 수도, 성을 초월한 이성 친구일 수도, 연인이나 배우자일 수도 있다. 피붙이 중에서도 아주 각별한 관계인 부모나 형제일 수도 있다. 단지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벽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기에 의지하고 의논할 멘토적 페르소나가 꼭 필요하다는 의의다.

선화, 하남, 수연, 선주 등의 감정을 변태 따위로 폄훼해선 절대 안 되는 근거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살마키스의 구애를 거부하는 바람에 불행해졌는데 그 이유가 아직 어려서 생경한 사랑에 덜컥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이제 16살, 18살이다. 몸은 경험이 부족하고, 감정은 이성이 불안하다.

그들이 동성애자라서가 아니라 그런 근원적 배경 때문에 지근거리의 인물들을 통해 이제 막 사랑을 조금씩 배워나갈 따름이다. 지금 막 근저에 가족 간의 사랑 이외의 사랑이란 탑을 쌓고 있는 중이다. 이성의 사랑을 거부해 불행해진 헤르마프로디토스가 되지 않기 위한 시뮬레이션 중인 것이다.

▲ 영화 <다영씨> 스틸 이미지

민재와 다영의 사랑은 페이소스적인 나르키소스의 나르시시즘이다. 민재는 처음 본 다영에게서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배송회사에서 최하위 서열인 그는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밟히는 자신 같은 그녀에 대한 연민에서 자기애가 생겨났고, 그 회사에 입사 후엔 자신이 다영에게 거울이 된다.

융의 분석심리학이 도입한 아니마(남성의 정신에 내재돼 있는 여성성의 원형적 심상)와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성)에 따르면 소녀들의 사랑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사회가 억제한 여성의 지위의 탈환에 대한 사유보다는 소여에 가까운 심리. 원형은 한 분야의 여러 부문에서 반복돼 나타나는 동향을 말한다.

‘다영씨’의 가해자들은 위선의 도덕 속에 숨은 야누스로 부도덕성을 합리화, 체계화한다. 피해자 다영과 민재는 그 부조리의 동맥경화에 전도된 정서로 사회적 질서에 전신마비가 온 것에 저항 대신 사랑을 택한다. 멜로 속에 이런 사르카즘(풍자)을 담은 연출력은 놀랍다. 그래서 둘의 사랑은 숭고하다.

사랑은 다양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공한 유부남 장군들은 제자랍시고 소년 애인을 공개적으로 두었다. 중세는 기사도정신이란 가식적인 명예로써 절제를 강요했기에 ‘트리스탄과 이졸데’ 같은 불완전연소된 금단의 사랑이 발생했다. ‘소녀의 세계’와 ‘다영씨’는 그 시대들보다 아름다운 로맨티시즘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