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7주년 기념식 그리고 부산일원 계엄령선포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8.12.04l수정2018.12.0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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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유신 7주년 기념식 그리고 부산일원 계엄령선포

1961년부터 시작된 3공화국은 18년동안 참으로 파란과 곡절이 많았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탓에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흔적과 잔물결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새로운 의욕으로 국가운영을 해보려고 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감옥에서 지내는 박근혜 전 대통령만 보더라도 그렇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딸은 대통령 임기도 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 하차는 불운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는 5.16 거사 때 맨 앞에 섰던 김종필 전 총리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다시 한번 3공화국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어쨌든 5.16때부터 시작된 3공화국은 10.26사건으로 그 주인공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종말을 고한다. 곧이어 결코 오지 않았을 것 같았던 일, 그러니까 그 해 12월 12.12 사건이 발생하면서 3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흐르는 강물에서 뒷물이 앞물을 밀치며 유유히 흐르듯 그 뒤에 5공화국이 탄생하면서 3공화국을 밀어내고 또 다른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되짚어볼까. 이미 역사로 기록된 편년체가 아닌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비화 중심으로 들여다보는 편이 훨씬 흥미진진할 것이다.

1979년 상반기를 보내고 참으로 사연이 많은 가을을 맞았다. 청와대를 주변으로 한 정국의 기류와 일련의 시국 분위기, 그리고 한국을 바라보는 국제적인 시각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특히 그해 10월, 박 대통령은 서서히 옥죄어 오는 불안의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해 몇 가지 말기적 증세를 나타내 보이기도 했다. 그렇더라도 10.26사건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다. 당시 긴박했던 10월은 이러 했다.

△ 4일-공화당, 유정회가 30년 의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총재 제명처리 △5일-미국정부 김영삼 총재 제명과 관련, 이례적으로 글라이스틴 대사를 본국으로 소환 △12일-신민당의원 66명 일괄사표 △13일-통일당 의원 3명 사표. 카터 미대통령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의 인권침해 상황을 우려한다는 성명 발표 △16일-유신선포 후 처음으로 부산대학생 3천여명 시위 △18일-부산일원 계엄령 선포 △19일-한국의 정치문제와 관련, 미국정부는 아시아개발은행 및 국제금융기관에 대한 경제개발차관의 통상적 승인 중지 △20일-마산, 창원에 위수령 발표 △23일-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계엄령철폐 성명발표. 계명대 2천여명 유신철폐 주장시위 △25일-윤보선 자택연금 △26일-제3공화국 종말.

얼핏 보더라도 숨가쁘게 불어대는 10월의 바람은 냉랭하고 폭풍전야의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부산 일원에 내려진 계엄령의 배경을 보면 이렇다. 10월17일 저녁 이 날은 마침 ‘유신 7주년 기념식’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로 이루어진 기념식은 ‘의원 노래자랑’이 계속 이어졌으나 부산소요사태로 박 대통령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부산에서 막 도착한 구자춘 내무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부산사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도청이 습격받았고 경찰서가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파티가 끝난 이후 박 대통령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이어 그날 밤 11시30분 중앙청 3층회의실에서 구자춘 내무장관이 부산사태에 대해 경과보고를 했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비상계엄 선포를 제안, 회의시작 10분만에 결론을 내렸다. 18일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계엄을 선포한다고 했다.

이튿날 밤 1공수여단의 박희도 장군 집무실에 정병주(鄭柄宙) 특전사령관의 긴급명령이 하달됐다. “지금 속히 부산지역으로 출동준비하시오. 그 곳 도착 후에는 박찬긍(朴贊兢) 군수기지사령관의 지휘에 따르시오.” 정병주 사령관은 이보다 하루 앞서 3공수여단장 최세창(崔世昌)장군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달, 이미 부산지역으로 출동시킨 상태였다. 계엄령 선포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사태의 기미가 누그러지질 않자 상부의 지시를 받고 정 장군이 증파명령을 내린 것이다.

20일 새벽 박희도 장군은 부산행 특별열차를 타기 위해 여단병력을 영등포역에 집결시켰다. 5공수도 출동명령을 받았는데 영등포역에는 정승화 총장과 김재규 중정부장이 배웅나왔다.

▲ 사진=kbs 뉴스 화면 캡처

계엄군 집무실에 김재규 중정부장 방문

1공수여단의 집결지는 부산수산대학교. 1공수가 증파되자 3공수의 일부 병력은 마산으로 향했다. 박희도 장군은 박찬긍 계엄사령관을 만나 배속신고를 한 뒤 우선 위력시위를 벌여달라는 명령을 받았다. 삼엄하게 중무장한 병력을 군용차량에 승차시켜 시내 중심가의 중앙선을 질주하거나 등하교 시간에 맞춰 시청앞과 역광장 등지에서 장병들을 집총자세로 세워두는 시위를 뜻했다.

박희도 장군은 부산에 도착한 이튿날 밤 뜻하지 않은 손님과 마주했다. 다름 아닌 김재규 중정부장이었다. 당시 김 중정부장은 계속되는 박 대통령의 꾸지람으로 입지가 약화된데다 차지철 경호실장까지 가세해 이래저래 사사건건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는 부마사태를 잘 해결해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사태추이를 정확히 판단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려고 애를 쓰고 있던 터였다.

느닷없이 방문을 받은 박 장군은 김 중정부장을 자신의 임시 집무실로 안내했다. 김 중정부장은 “어떻게 될 것 같소?”라는 말을 꺼내며 자리에 앉았다. 박 장군은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고 말하면서 주로 소요사태와 관련된 얘기를 주고 받았다. 잠시 후 김 중정부장이 떠나면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부대원들이 고생하는데...”라고 말했다. 박 장군은 “혹시 각하께서...”라고 되물었으나 김 중정부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이 직접 주는 것이라고 했다.

박 장군은 당시를 기억하면서 “결과론적인 얘기일지는 모르지만 그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사실 큰 작전을 수행할 때 박 대통령이 금일봉을 하사해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해주는 경우는 있으나 중정부장이 직접 군부대에 금일봉을 내놓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특히 김 중정부장이 준 돈은 보통 촌지 수준을 벗어나 상당한 액수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어쨌든 박 장군은 김 중정부장으로부터 받은 전액을 부대원들의 위로금으로 사용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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