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부산에서 받은 박 대통령 서거 소식

계엄군이 진주한 지 사흘째부터 부산, 마산 등지의 소요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됐고 거리의 질서도 많이 회복됐다. 10월24일이 되자 통금시간을 종전과 같이 환원시켰다. 당시 부마사태를 요약하면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대학생과 시민들이 공화당의 유신 독재에 반대하여 일으킨 시위 사건이다. 야당인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에 선출됐으나 이후 총재직 정지, 의원직 박탈,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 66명 전원 사퇴서 제출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10월 15일 민주 선언문이 배포되고 반정부 시위가 전개됐다. 대학생과 시민들이 유신 정권 타도를 외치며 방송국을 점령하고 세무서 등을 파괴하는 등 강력한 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들을 진압하였다. 19일에는 시위가 마산, 창원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나 군대의 출동으로 진압됐다.

부대를 복귀시키려던 10월26일 오전 박 장군은 최석원(崔錫元) 부산시장한테 다음과 같은 제의를 받았다.

“장군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는데 서울로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부산 앞바다를 구경 한번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내일 오전 우리 시청 소속 배를 수영만에 대기해놓고 있겠습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26일 밤 10시쯤 수영 앞바다의 유람을 기대하며 잠을 막 청하려는 순간 ‘대통령 유고’라는 긴급 연락을 받았다. 그러면서 지체없이 서울로 상경하라는 것이었다. 사령부에 알아보니 정병주 사령관은 이미 비행기로 상경하고 자리에 없었다.

박 장군은 일단 긴급 임시열차를 준비해줄 것을 요청한 뒤 새벽 3시가 다 되어야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직접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전 사령관은 “대통령이 돌아가셨다. 빨리 상경해야 한다.”는 말만 했고 더 이상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 시각의 서울 상황은 보안사측이 김재규 중정부장을 이미 체포해 놓고 있을 때였다. 새벽 5시쯤 특별열차가 배차되자 병력을 이끌고 열차에 탑승했다. 서울행 열차 안에서도 박 장군은 대통령 시해범이 며칠 전 자신한테 금일봉을 건네준 김재규 중정부장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다만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의 소행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에 도착하자 그게 아니었다. 범인이 김재규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됐고 잠시나마 부대에서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박 장군 휘하병력들은 곧장 서울지역 계엄분소(현 신라호텔 뒤)에 배치명령을 받고 즉각 시내 200여 곳의 중요시설물에 투입됐다. 이어 박 장군은 다른 여단장들과 함께 청와대에 마련된 박 대통령 빈소를 방문, 조의를 표했다. 며칠 뒤에는 전 국민의 애도속에 장례식이 거행됐다. 이 때 박 장군은 장례식의 경비총책을 맡았다.

“그 날 서울역 광장에 수많은 인파들이 모여 들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왜냐 하면 저는 그 때 대우빌딩 꼭데기에서 장례식 상황을 진두지휘했었지요.”

이후 박 장군은 서울의 주요 지역을 경비하는 자신의 휘하병력을 지휘하며 권력공백으로 생길지 모르는 돌발사태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다가 12.12사건의 소용돌이를 맞이한다.

정승화 총장 권유로 10.26사건 재판장 맡아

▲ 사진=ktv 화면 캡처

10.26사건의 범인인 김재규는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은 뒤 법정에 서게 됐다. 이 때 김영선 장군이 재판장을 맡아 재판을 진행했다. 1977년 11월 군장성 인사때 논산훈련소장이던 김영선 장군은 중장진급과 동시에 3사관학교장으로 발령받았다. 군복을 벗을 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으나 박 대통령의 배려로 진급하게 됐다. 논산훈련소의 개혁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박 대통령이 이세호 육군참모총장한테 김영선 장군의 진급을 검토해보라는 지시로 인해 별을 하나 더 달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김 장군은 아니러니컬하게도 10.26때 재판장을 맡아 자신을 진급시켜준 박 대통령의 서거과정을 낱낱이 파헤치게 된 것이다.

그가 10.26사건의 재판장을 맡게 된 계기는 이러했다.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한 며칠 뒤 정승화 참모총장한테 전화가 왔다. 요지는 10.26사건의 재판진행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왜 자신이 선택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은 곧 풀렸다. 당시 육군 중장급 장성은 참모차장, 합참본부장, 군단장 등 모두 10여명.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10.26 사건 현장의 주역들인 김계원, 김재규, 차지철 등과 어떤 형태로든 연(緣)이 닿고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김영선 장군만이 아무런 ‘연줄’이 없었다. 그래서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총장 등은 가장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 장성이 바로 김 장군이라고 판단, 적극 추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른바 ‘빽’도 없이 군생활을 해온 것이 계기가 되어 역사적인 재판을 맡게 됐던 것이다.

김재규 무료변론 신청자 쇄도 ‘염불보다 잿밥’

▲ 사진=ktv 화면 캡처

김 장군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재판초기에는 김재규의 무료변론 신청자가 모두 22명에 이를 만큼 쇄도했다.”고 말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떤 사명의식이나 동정적인 차원에서 무료변론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다. 이에 대해 김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에는 김재규쪽으로 관심이 많이 쏠렸다. 가공할 위력을 가진 유신독재가 무너진 상황이었다. 엄청난 권력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공백상태’를 생각해보라. 어쨌든 그 막강한 권력의 핵심, 즉 박 대통령과 차지철 실장을 쓰러뜨린 장본인이 김재규가 아닌가. 그러다보니 김재규를 중심으로 권력재편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성급한 추측도 있었다. 또 당시 정가에는 얼마 후 곧 총선이 있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총선을 노리는 변호인들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10.26사건의 변호인이었다는 것은 좋은 경력이 아니겠는가. 변호인이 서로 돕겠다고 나선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결국 김재규의 변론은 김정두 변호사가 도맡다시피 했다, 김 변호사는 김재규와 동성동본(금녕김)으로 먼 친척관계였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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