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그린치>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애니메이션 ‘그린치’(스콧 모지어, 야로우 체니 감독)는 론 하워드 감독, 짐 캐리 주연의 동명의 실사영화(2000)에 비하면 한결 간단하고 쉬우며 밝다. 유머는 일루미네이션답게 극대화했다. 눈의 마을 후빌에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오고 사람들은 코앞에 닥친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들떠있다.

도나는 밤에는 일을 하고 낮에는 딸 신디 루의 뒷바라지와 쌍둥이 형제의 육아를 하는 ‘슈퍼 맘’이다. 활발한 성격의 신디 루는 엄마에게 힘을 보탤 길이 없을까 고민하다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와 직접 대면할 결심을 한다. 다른 선물은 필요 없으니 엄마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는 것.

마을 북쪽 산꼭대기 동굴엔 심술궂은 그린치가 애완견 맥스와 산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지난 53년 내내 외로웠지만 크리스마스가 제일 괴롭다. 마을에 내려온 그는 축제 분위기로 활기찬 사람들에게 괜히 심술을 부린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브리쿨바움에게조차 불친절하다.

행복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과 이질감이 극대화된 그린치는 그들의 크리스마스를 소거하겠다고 결심한다. 모든 사람들의 선물과 트리 등을 빼앗아 버리면 그들의 크리스마스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 늦은 밤 브리쿨바움의 썰매를 훔친 뒤 맥스에게 그걸 끌게 하고 닥치는 대로 절도를 한다.

▲ 영화 <그린치> 스틸 이미지

200여 가구의 마을을 다 돌고 마지막으로 신디 루의 집에 침입한 그는 그만 유혹을 참지 못하고 쿠키를 집어 든다. 그 순간 신디 루가 설치한 덫에 억류되고 그 소리를 들은 신디 루가 깨어난다.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소원을 말하고 그린치는 뻔뻔스럽게 산타 행세를 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드디어 크리스마스의 날이 밝고 마을은 그들의 크리스마스가 도둑을 맞은 사실을 알고 망연자실하는데. 실사영화가 매우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시작된다면 이 영화는 가볍고 경쾌하며 유머러스하다. 처음부터 그린치가 스쿠루지나 놀부 같은 이유가 명쾌하게 제시된 채 진행되므로.

동굴에 은신한 그는 타락한 차라투스트라다. 참혹한 현실에 마주한 인류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개개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한 주권적 저항을 외치며 망치를 쳐들고 기독교의 윤리를 거부하는 니체와 매우 닮은 듯 행세한다. “산타클로스보다 내가 모자란 게 뭐 있어”라는 식.

하지만 그가 날조된 니체인 건 신을 안 믿으면서도 니체의 ‘창조적 힘’을 고작 절도로 대체하는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가 신앙을 버린 게 주체적 삶을 지향하는 게 아니라 고작 어릴 때부터 익숙해진 외로움에 대한 반항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성 가치에 대한 비판적 사유가 아닌 불만과 질시.

▲ 영화 <그린치> 스틸 이미지

내레이션은 그가 비뚤어진 이유가 심장이 다른 사람의 3분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오로지 외로운 아픔밖에 없는 그는 사람들의 평범한 크리스마스 소원조차 요구라고 폄훼한다. 그의 정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황량했고, 생활은 무미건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가족 없이 외롭게)사는 게 나아”라고 자조를 자족으로 대체하는 궤변을 펼친다. 그와 맥스가 마주한 식탁의 간격이 황당할 만큼 먼 건 노골적인 메타포. 그에게 첫 번째 니체로 다가오는 이는 뚱뚱한 순록 프레드다. 그를 억압하고 사육하려던 그린치는 그의 가족을 보고 놓아준다.

두 번째 니체이자 산타클로스로 만나는 이는 신디 루다. 산타에게 편지를 부치려다 아예 직접 만나러 핀란드 로바니에미(산타 마을)까지 가겠다는 진취적인 기상을 지녔다. 그녀의 친구는 수학 책을 무시한다. 진보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서적인 소녀들이 그린치의 녹색 얼음의 무장을 해제하는 것.

그린치는 마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를 ‘탐욕에서 비롯된 허영과 낭비’라고 비뚤어진 색안경으로 봤었다. “사람들은 늘 쾌활하게 웃는다. 하지만 난 그건 못해”라고 선을 그었지만 산타로 오인한 신디 루가 따뜻하게 포옹해주는 순간 프레드에게 받은 가족애를 더해 심장을 키우게 된다.

▲ 영화 <그린치> 스틸 이미지

그 포옹은 인간미와 가족애의 포용이다. 그래서 그는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면 나도 행복해질 수 있다”라는 걸 깨닫는다. “지금까지 크리스마스를 증오했는데 진짜 증오한 건 외로움이었다”라고 깊은 동굴 안에 칩거한 채 살아온 자신의 모순을 깨닫고 친구와 가족의 소중함에 빗장을 풀게 된다.

세상에 대한 안티테제로 가득 찼던 그린치를 사회로 융합하는 진테제는 친절이다. 신디 루로 시작된 친절은 모든 마을사람들에게 전파된다. 그린치가 그걸 느낄 즈음 처한 위기 때 순록들과 맥스(모든 친구)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활약으로 구해주는 건 사회 부적응자를 친절로 돕자는 주제다.

순록과 자그마한 염소의 유머는 여러 차례 폭소를 유발한다. 뮤지컬 형식의 차용은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애교적인 포석이다. 주제가 지나치게 간단명료한 건 가족용이기 때문. 그린치의 외모가 다른 건 외형적 형상보다 내면적 지향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89분. 전체 관람 가. 12월 1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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