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10.26 최후의 만찬 아이디어 박정희가 아닌 김계원

그렇다면 10.26사건이 생기던 날 궁정동의 만찬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을까. 그동안 이 날 만찬은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로 됐다. 그러나 10.26 재판장을 맡았던 김영선 장군은 이와 다르다. 궁정동 안가에서 베풀어진 최후의 만찬은 김계원 비서실장의 아이디어였다고 말한다.

김 장군의 증언에 의하면 10월26일 오전 서울 용산의 미군헬기장에서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간의 심한 말다툼이 발단이 됐다. 이들의 언쟁을 목격한 김계원 실장은 소원해진 두 사람간의 관계를 무마해보려고 이 날 오후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차 실장에게 슬쩍 만찬을 제안했다는 것이다. 차 실장도 김 실장의 제안을 받아들여 헬기가 청와대에 도착하자 박 대통령한테 보고하게 됐고 김 중정부장도 참석하는 연회를 준비하게 됐다. 이같은 내용은 당시 재판장 자격으로 현장검증 과정에서 밝혀진 것이라고 김 장군은 증언했다. 김 장군은 또 10.26사건은 “유신의 심장에 총을 쏘았다.”는 김재규의 주장처럼 사전에 계획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격분을 참지 못해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며 김재규의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졌다는 일부의 ‘설’을 일축했다. 다음은 김 장군의 증언이다.

“재판장에 임명된 직후 나는 노재현 장관과 정승화 총장을 만났다. 이 때 정 총장은 ‘재판은 속히 끝날 것이니 너무 걱정말라’고 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육군구치소에 있는 김재규가 소복을 입고 박 대통령의 명복을 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는 김재규가 모든 것을 순순히 자백하고 있으니 순조롭게 재판이 진행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나중에 김재규는 유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며 여론을 겨냥했고 또 대학교 개강시기인 1980년 3월까지 재판을 질질 끌려고 했다.”

김 장군은 당시의 상황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이 중에는 새로운 내용들도 더러 있다.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보다 자세하게 재구성해본다.

▲ 사진=ktv 화면 캡처

1979년 10월26일, 이 날은 두 곳의 지방행사가 있었다. 충남 삽교천행사와 보안시설 개소식이 그것이었다. 이 중 보안시설은 정보부 소관이어서 김재규 중정부장도 겸사겸사 박 대통령을 모신다는 나름대로의 명분을 갖고 헬기장에 도착, 대기하고 있었다. 출발시간이 되자 박 대통령과 차 실장, 그리고 김계원 실장 등이 대통령 전용 1호 헬기에 탔다. 이 때 김 중정부장도 1호기에 타려고 했다. 이와 동시에 차 실장은 “김 부장은 저쪽 2호기 헬기를 타시오.”라고 명령조로 말하며 탑승을 저지했다.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민 김 중정부장은 왜 못타느냐고 항의했으나 차 실장은 “경호실장이 그러면 그러는 줄 알라.”고 쏘아붙였다. 심한 모욕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김 중정부장은 1호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고 2호기에 타지 않고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남산으로 돌아와버렸다.

이 날 삽교천 행사 뒤에 벌어진 보안시설 개소식에는 김 중정부장이 참석하지 않고 대신 중정의 차장보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의 일행을 마중했다. 김계원 실장은 내심 걱정이 됐다. 김 중정부장이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날 오후 충남지방의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1호기 안에는 웬지 긴장감이 팽배했다. 박 대통령은 평소에도 과묵했지만 이 날따라 창밖을 응시하는 모습이 퍽 쓸쓸해 보였다.

헬기가 서울상공으로 진입했을 때 김 중정부장과 차 실장의 관계를 고심하던 김 실장이 차 실장의 옆구리를 툭 쳤다. “차 실장, 할 말 있소.” 앞자리에 앉아 있는 박 대통령이 들을 수 없도록 차 실장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차 실장이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차 실장, 김 부장이 기분이 영 안 좋은 것 같소.” 차 실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김 실장의 눈을 응시했다. 김 실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오늘 오전 헬기장에서 말이오. 차 실장이 2호기에 타라고 하는 바람에 화가 나서 그냥 남산으로 돌아간 것 같소. 그렇지 않다면 차장보가 행사장에 왜 나왔겠소.” 차 실장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다시 김 실장이 말을 이었다. “차 실장, 오늘 저녁 궁정동에서 만찬을 하는 게 어떻겠소. 내가 각하를 모실테니 차 실장이 김 부장을 불러 김 부장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좋겠소.” 최근들어 둘 사이에 마찰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아 김 실장은 어떻게 해서든 화해를 시켜보려고 마음을 먹고 있는 터였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차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했다. 1호 헬기가 청와대에 도착하자 김 실장은 박 대통령한테 궁정동 만찬을 건의했고 박 대통령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 내리겠다.”

김 장군은 재판장을 맡고 나서 다른 일행들과 함께 궁정동 등 현장검증에 나섰다. 국가원수가 시해됐다는 점에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 중정부장을 위로하려던 만찬자리가 엉뚱하게 성토자리가 됐고 순간적으로 격분을 이기지 못해 김 중정부장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도 현장검증 과정에서 밝혀냈다. 아울러 10.26총성은 순전히 우발적이며 ‘유신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는 것은 김재규 자신이 범행 후 만들어낸, 즉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킨 논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재판 당시 김재규 자신이 법정에서 밝힌 10.26 거사동기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법정진술 내용이다.

<...금년 10월에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 저는 현지에 내려갔습니다.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남민전이나 학생이 주축이 된 데모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지에서 보니까 그게 아닙니다. 160여명을 연행했는데 16명이 학생이고 나머지는 다 일반시민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모양상을 보니까 데모하는 사람들도 사람이지만 그들에게 주먹밥을 주고 또 사이다나 콜라를 갖다주고 경찰에 밀리면 자기 집에 숨겨주고 하는 것이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들이 완전히 의기투합한 상태였습니다. 주로 그 사람들의 구호를 보니까 체제에 대한 반대, 조세에 대한 저항, 물가고에 대한 저항, 정부에 대한 불신 등 이런 것이 작용해서 경찰서 11개를 불질러버리고 경찰차량을 10여대 파괴하고 이런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를 각하께 그대로 보고드렸습니다. “각하, 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이렇습니다.”라고 보고하면서 각하의 생각을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영 반대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여기 변호인밖에 없긴 하지만 이 말씀은 밖으로 안 나갔으며 좋겠습니다. 각하 말씀은 “이제부터 사태가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자유당 말기에는 최인규라는 사람과 곽영주라는 사람이 발포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되었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을 하는데 누가 총살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의를 위해 원천을 때렸습니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이런 문제에다 차지철 경호실장 같은 사람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어떠냐는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끼칠 일들입니다. 그래서 건의를 쭉 해봤지만 그럴수록 반대효과만 납니다. 처음에 제가 부임할 때는 한번 순리적인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바꿔놓을 절호의 기회다 생각했는데 급기야 이건 불가능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해봤습니다. 이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는데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 물러설 줄 모릅니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는 반드시 큰 공방전이 벌어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상할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만 하더라도 교도소에 400~500명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쫓겨난 학생수가 800~1천명 정도입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를 해야 할 나라가 독재를 하면서 원천적으로 정부가 해서는 안될 일들을 저질러놓고 ‘자유민주주의 하라’ ‘독재체제 반대다’하는 사람을 처벌하니 이건 적반하장격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은 역시 방법이 없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대통령 각하와 자유민주주의 회복과는 아주 숙명적인 관계를 맺어놓고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제 나이 호적에는 53세로 되어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55세입니다. 그러니 제 나이 한 10년이나 20년 끊어바치더라도 좋으니까,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자,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입니다. 그렇다면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결국 나의 명예고 지위고 목숨이고, 또 대통령각하와 나와의 의리도, 이런 소의에 속하는 것은 한꺼번에 다 끊어바친다, 대의를 위해 내 목숨 하나 버린다, 그래서 원천을 때렸습니다.>

재판 당시 법률적 자문은 주로 서울지법 판사들로부터 받았다. 어쨌든 이같은 김 장군의 증언은 김재규의 거사동기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가치가 있는 일로 평가된다고 할 수 있겠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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