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레토’(카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는 칸국제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핸디캡일 만큼 재미를 갖춘 아트버스터다. 아직도 많은 러시아인들의 가슴속에 우상으로 남아있는 한국계 로커 빅토르 초이를 기리는 차원을 넘어선 ‘택시운전사’와 ‘1987’의 메시지를 담은 판타지-컬트-록 무비다.

1981년 레닌그라드. 인기 로커 마이크(로만 빌릭)는 자신의 밴드 주파크 멤버 및 그들의 연인들과 바닷가로 놀러 간다. 멤버 중 펑크가 초대한 촌뜨기 청년 빅토르 초이(유태오)와 리오샤가 합류한다. 그 자리에서 빅토르의 자작곡을 들어본 마이크는 흔쾌히 친구로 받아들이고 음악적 교감을 나눈다.

마이크는 연인 나타샤(이리나 스타르셴바움)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그 사이 매우 가까워진 빅토르는 주파크 멤버들과 마이크의 집에서 밤을 새우며 음악 작업을 하고 술을 마신다. 마이크는 까다로운 공연장 심사원 타냐를 잘 설득해 빅토르를 무대에서 세움으로써 그의 시대를 열어준다.

큰 구성은 마이크, 빅토르, 나타샤, 그리고 내레이터로 이뤄진다.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페레스트로이카 및 그라스트노스트를 기초로 한 개혁정책이 자유화의 물결로 이어져 결국 사회주의가 무너졌지만 그 전까진 암흑의 시대였다. 빅토르는 억압의 해방구이자 일탈의 아이콘이었다.

▲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레닌의 후계자 스탈린 때부터 독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본뜻을 왜곡함으로써 정권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 국민의 인권, 자유, 행복, 민족정신 등을 유린하고 훼손했다. 그래서 영화는 대놓고 60~70년대의 저항시인이자 반체제 뮤지션인 블라디미르 비소츠키를 거론하며 빅토르에 오버랩한다.

빅토르가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면 마이크는 개혁이 옳은 건 알지만 용기가 부족하거나 기존 체제가 익숙해 변화에서 발을 빼는 ‘원숭이 마음’의 지식인이다. 나타샤는 그와 닮은 듯하지만 빅토르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을 만큼 개방적이고 솔직하며 자아에 충실한 면이 있는 야누스다.

내레이터는 시퀀스가 바뀔 때 무시로 등장해 뮤직비디오로 이끌고 가는가 하면 판타지로 꾸미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념의 이론과 인간의 욕심 사이의 이율배반과 불협화음, 이데올로기의 도그마의 함정과 욕망의 불건전성 등을 코믹하게 풀어가는 과정을 통해 컬트와 판타지적 장치를 주도한다.

자유와 저항을 담은 록에 대한 기성세대의 편견 등은 당시의 소련에서 국가적 제약과 맹목적인 이념 추종이 얼마나 횡포를 부렸는지 가슴 서늘하게 보여준다. 콘서트에서 관객에겐 사소한 율동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빅토르의 심오한 가사는 ‘건전한 메시지를 전하는 풍자’라고 속여서 심의를 통과한다.

▲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열차 안에서 멤버들이 흥겹게 록을 노래하자 지나가던 늙수그레한 한 승객은 ‘원수 미국의 노래를 부른다’며 시비를 걸고 욕을 하더니 보안요원을 불러 연행되도록 만든다. 1981년에 한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광경이란 데자뷔! 그래서 이 영화는 ‘1987’이고 ‘택시운전사’와 맥락을 함께한다.

마이크가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버건디만 고집하는 건 이런 소련의 표리부동과 부조리를 비꼬는 설정이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얼굴이 빨개질 만큼 부끄러운 버건디(빨강). 멀쩡한 눈으론 바라보기 힘들 만큼 일그러진 어두컴컴한 사회.

그들이 산 시간적 공간적 세계는 암울했지만 영화의 비주얼과 사운드는 마냥 흥이 넘치고 청춘의 싱그러움이 넘실댄다. 부정적 환경 속에서도 예술적 취향과 갈망을 놓지 않고 안다미로 분출되는 패기로 창작의 고뇌를 인상파 회화 같은 펑크록의 서사시로 구축해내는 뮤지션들의 삶은 숭고하다.

토킹 헤즈의 ‘Psycho killer’, 이기 팝의 ‘Passenger’, 티렉스의 ‘Children of revolution’, 루 리드의 ‘Perfect day’ 등 동시대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후배 뮤지션들에게 거울이 된 주옥같은 영미 록 넘버들을 감상하는 호강은 ‘보헤미안 랩소디’와는 다른 차원이다. 이단적 언더그라운드이기 때문이다.

▲ 영화 <레토> 스틸 이미지

빌릭은 러시아의 대표 록밴드 즈베리의 리더로서 배우 데뷔 및 음악감독으로 참여해 사운드에 방점을 찍었다. 현재보다 낙후된 당시 녹음 기술 및 기자재와 악기에 의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장인정신이다. 마이크의 가장 우울한 시퀀스에 ‘Perfect day’를 삽입한 센스!

오스카 와일드와 잔 다르크를 거론한 건 빅토르(1962~1980)나 마이크(1955~1981)의 인생이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는 메타포다. 와일드는 미의 창조를 예술의 유일하고 지고한 목표라고 주창한 유미주의(탐미주의)의 표제다. 빅토르의 록은 구소련만의 메타 록이자 펑크의 펑크라는 뜻을 함축한다.

주인공들이 거론하고 즐겨 듣는 음악들은 록의 하위 장르 중에서도 언더그라운드 성향이 강한 펑크, 글램록, 얼터너티브록, 아트록 등이다. 뮤지션 대다수의 음악과 스타일은 니힐리즘과 페시미즘의 극치였다. 빅토르의 정서다. 그래서 “스위트(대중적 취향의 록그룹)의 노래는 어이없다”라고 비웃는다.

빅토르는 백년전쟁 말기 조국 프랑스를 구한 잔 다르크 정도의 영웅은 아닐망정 최소한 억눌린 한숨으로 두 발이 땅속으로 가라앉아 아예 방황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종교)은 된다는 메타포. 재미와 예술을 동시에 잡기 흔치 않은 청춘의 록 무비다. 128분. 15살. 내년 1월 3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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