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권제의 생활어원 및 상식] 우리가 초등학교 때 불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성냥뿐이었다. 또한 그때는 집집마다 대부분 통성냥이라 고구마 등을 구어 먹을 때 밖으로 가지고 가서 놀다가 늦게라도 가지고 오면 저녁을 짓는게 늦어져서 어머니한테 혼나곤 했다. 성냥은 나무나 단단한 종이 끝에 발화제인 인 등을 붙여 마찰열로 발화한다. 지금은 라이터가 대세가 됐는데, ‘성냥’은 ‘언해태산집요(1608)’에 나온 옛말 ‘석류황’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현대의 마찰성냥은 딱성냥과 안전성냥이 주종이다. 딱성냥은 머리 부분에 마찰열로 발화되는 화학물이 칠해진 반면 안전성냥 머리 부분을 발화시키기 위해서는 특수 화학성분을 처리한 표면에 마찰시켜야 한다.

성냥의 역사를 보자. 19세기 초까지 불씨를 만들려면 부싯돌을 마찰시키야 했다. 성냥 발명 전에는 불꽃을 옮기기 위해 황 같은 가연성 물질을 바른 나뭇개비를 사용했다. 성냥은 1669년 독일인 브란트의 인 발견으로 시작됐다. 그는 은을 금으로 만들기 위한 연금술 실험 중 공기를 차단 후 소변을 끓였는데 어떠한 현상도 없자 병에 담아 보관했다. 어느 날 밤 병에서 은은한 빛이 나왔는데, 소변으로 나운 인 성분이 산화되지 않아 그 특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인이 50℃에서도 불이 붙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1680년 영국의 화학자 Robert Boyle은 나무 조각 끝에 유황을 씌우고 인을 바른 종이에 그어 불씨를 만들었다. 하지만 불이 쉽게 붙고 위험해 성냥으로 사용은 불가능했다. 1805년 프랑스의 장 샹셀 등은 염소산 칼륨, 설탕, 고무가 묻은 얇은 나뭇개비들을 황산에 담그면 발화되는 사실을 발견하고 에틸에테르의 ‘ethereal matches’를 만들었다. 그 외 산이 들어있는 유리구슬로 끝부분을 처리한 성냥은 유리구슬을 깨면 화학 처리된 끝 부분이 공기 중에 발화하며 불이 붙는 방식이었다. 마찰로 발화되는 인 성냥은 1805년초 파리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최초의 인 마찰 성냥을 만든 사람은 1816년 파리의 프랑수아 드로슨이라 한다. 후에 학자들은 이 방법을 개선시켰고, 초기 공급자들은 인이 아닌 염소산 칼륨 혼합물을 사용했다.

오늘날 성냥은 1826년 영국의 약제학자인 John Walker가 개발했는데 여기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의 설은, 그는 황화 안티몬, 염소산 칼륨, 유황, 고무 혼합물을 막대기로 젓다가 막대를 닦기 위해 돌바닥에 비볐는데 불이 붙었다. 그는 이 원리로 마찰성냥(friction match)을 발명했다. 다른 하나는, 그는 연소산 칼륨과 황화 안티몬을 섞어 천에다 발랐으나 별 반응이 없자 난로 뒤쪽에 두었는데 갑자기 불이 붙었다. 이는 황화 안티몬이 인처럼 쉽게 불붙지 않지만 염소산 칼륨과 결합되면 고열에 자연 발화가 되기 때문이다. 워커는 연구를 거듭해 열이 없어도 이 혼합물에 마찰을 가하면 발화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후 1827년 천들을 작게 썰어 작은 나무 막대에 감아 말린 뒤 유리조각이 묻은 종이에 그어 불 붙이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마찰성냥은 1828년 런던의 새뮤얼 존스가 특허 받은 프로메테우스 성냥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1829년 그는 많은 성냥을 생산했다. 이는 산을 포함한 유리구슬로 되어 있으며, 구슬의 바깥쪽은 발화성 물질로 덮여 있어서 유리를 깨면 그것을 감고 있는 종이가 타게 되어 있었다. 1831년 프랑스의 샤롤 소리아는 흰인/ 황인을 첨가해 최초로 안정되고 발화되기 쉬운 성냥을 만들었다. 1832년 프랑스의 G. E. 메르켈과 오스트리아의 J. 지갈은 인없는 마찰성냥을 만들었는데 이 시기 유럽에서 마찰성냥 제조가 활성화되었다. 이 초기 마찰성냥은 발화하기가 힘들고 포개둔 사포 사이에 넣었다가 꺼내면 불이 붙었는데, 성냥을 쥔 사람 손에서 작은 불꽃이 쏟아지며 폭발했고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래서 성냥갑에 "폐가 약한 사람은 루시퍼(황인 성냥) 사용금지" 경고문구를 넣었다. 1833년 독일에서 발화점이 인보다 높은 황린을 이용해 유리종이 없어도 물체에 마찰하면 불붙는 성냥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제품은 황린 생산과정의 유독가스 발생으로 작업자의 질식사가 잇따라서 워커 성냥을 더욱 선호하였다. 황린 성냥은 1922년 국제조약으로 제조가 금지되었다. 

하지만 워커의 성냥도 성냥갑에 성냥을 담아 놓으면 성냥끼리 마찰해서 발화하는 단점이 있었다. 스웨덴 화학자 Gustave Pasch는 1844년 특수 고안된 성냥갑에 문질러야 불이 붙는 안전한 성냥을 개발했다. 그는 황화 안티몬과 적린 화합물만 성냥갑 마찰면에 바르고 성냥 알맹이는 염소산 칼륨과 황으로만 만들었다. 혼합물들을 분리하면 성냥 알맹이 자체의 마찰로는 발화되지 않고 적린 등이 칠해진 성냥갑의 마찰면에 문질러야 발화가 됐다. 오늘날의 성냥은 불이 적린이 칠해진 마찰면에서 먼저 일어난 다음 성냥 알맹이에 옮겨 붙는 것이다. 1845년 오스트리아의 화학자인 안톤 폰 슈뢰터가 발명한 독성없고 자연발화를 하지 않는 붉은인으로 성냥의 머리 부분과 특수한 마찰면 사이의 연소성분을 분리시킨 안전성냥을 만들었다. 1848년 독일인 뵈트거도 안전성냥을 발명했다. 1855년 스웨덴의 J. E. 룬드스트룀은 안전성냥의 특허를 받았다. 비록 안전성냥이 널리 사용되었지만 품질좋고 기후조건에 영향이 적은 흰인 성냥이 계속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19세기 말 흰인은 공장 근로자에게 인괴사를 유발하는 유독물임이 밝혀졌다. 1864년 프랑스 화학자 조르주 르무안은 독성이 약한 세스퀴 황화인을 최초로 만들었으나, 프랑스 정부 성냥 전매국의 E. D. 카앙과 H. 스벤이 1898년 특허출원을 할 때까지 성냥에 사용되지 못했다. 몇년 내 거의 모든 곳에서 흰인 사용이 금지되었다. 현재의 안전성냥은 황화 안티몬과 머리 부분에 염소산 칼륨, 황 또는 숯 같은 산화제, 그리고 마찰면에는 붉은인이 칠해져 있다.

한국은 소나무를 얇게 깎아 끝에 황을 묻힌 것을 불씨에 붙여 발화하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1880년 개화승 이동인이 일본 수신사 김홍집과 귀국하며 성냥을 들여왔다. 1910년 일본인이 인천, 수원, 부산 등에 공장설립으로 대중화되었다. 8·15 해방 후 한국인이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해 전국에 수공업공장을 세웠다. 1970년대 자동화시설이 도입되어 대형화 되었으나 자동 점화장치의 발달, 라이터 보급 증가로 점차 사양화되어가고 있다.

불피우는데 유용한 ‘성냥(match)’은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을까?

‘match’는 고대 그리스어 ‘múxa(램프 심지)’가 라틴어 ‘myxa(발사구, 램프의 굽은 부분)’가 됐다. 이 말이 통속 라틴어 ‘micca’로 변형되어 고대 프랑스어 ‘mesche/ meische’와 ‘mèche(초 심지)’를 거쳐 중세 영어 ‘macche/ mecche’로 유입되어 최종 ‘match’로 정착했다. 역사적으로 ‘match’는 화학물질로 불타는 도화선을 지칭했다. 이것들은 불과 총과 대포를 점화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들 도화선은 타틀어 가는 속도에 의해 ‘quick match’와 ‘slow match’로 규정이 되었다. ‘slow match’는 1시간 당 30cm 정도가 탔고 ‘quick match’는 1분당 4~60cm 정도 탔다. 오늘날 이런 종류의 ‘match’는 여전히 불꽃 제조술에 쓰이는데 단순 fuse라 한다. 단어의 원래 의미는 ‘black match(퓨즈가 혼합된 흑색 화약)’와 ‘Bengal match(불꽃, 폭죽)’처럼 불꽃 제조술 용어로 지속되고 있다. 그렇지만 마찰을 이용한 성냥이 일반화되면서 용어 ‘match(성냥)’이 대표어가 되었다. 오늘날 성냥을 영어로 ‘match’라 부르는 것은 바로 성냥개비와 마찰종이가 쌍으로 어울려야 한다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김권제 칼럼니스트]
고려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졸업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