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말모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일제 강점기 우리말을 지키려는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말모이’(엄유나 각본, 감독)는 재미나 완성도를 떠나 미국이 ‘늑대와의 춤을’이나 ‘포카혼타스’를 만든 걸 거울삼아 한국 영화계가 본받아야 할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주시경이 우리말을 지키려 애쓰다 세상을 떠난 뒤 1941년.

경성제일중고 이사장 류완택은 친일매국노지만 아들 정환(윤계상)은 조선어학회 대표가 돼 문당책방 지하에서 은밀하게 국어사전을 만들고 있다. 아내를 잃고 중학생 덕진(조현도)과 7살 순희(박예나) 남매를 키우는 김판수(유해진)는 근무하던 극장에서 수시로 비리를 저지른 게 드러나 해고된다.

문당책방에는 판수의 감옥 동기인 조갑윤(김홍파), 술을 사랑하는 시인 임동익(우현), 협회 잡지 ‘한글’ 기자 박훈(김태훈), 남편이 함흥형무소에 구금된 책방 주인 구자영(김선영), 아내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막내 민우철(민진웅) 등이 근무하고 있다. 일손이 부족하자 갑윤은 판수를 데려온다.

정환은 전과자이자 까막눈인 판수를 결사반대하지만 회원들은 판수의 말솜씨에 반해 그를 옹호한다. 그렇게 손발을 맞추게 된 우리말 지킴이들은 열성적으로 8도 사투리를 그러모은다.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의 본격화를 위해 국민총력연맹을 결성하고 책임자로 우에다(허성태)를 내세운다.

▲ 영화 <말모이> 스틸 이미지

만주에서부터 정환의 행적을 쫓았던 우에다는 완택을 협박해 정환을 연맹에 가입시키고 창씨개명을 시키려 하는 한편 어학회의 비밀스러운 행적을 수사한다. 어느 날 덕진은 스스로 창씨개명을 하고, 우철은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책방에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소중한 원고를 압수해 가는데.

고언부터.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담당한 뒤 장편 상업영화 연출자로 데뷔한 엄 감독의 연출 솜씨는 아직은 세련미와 거리가 있다. 하고자 하는 말에 비해 135분의 러닝타임도 다소 길게 느껴진다. 드라마를 위한 장치이긴 하지만 정환의 캐릭터는 초반에 다소 과장됐다. 의외로 쉽게 바뀌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국 상업영화계 그 누구도 손대려 하지 않았거나 생각도 못 했던 우리말의 생존의 뒤안길과 그 배경에 애국자들의 목숨 건 노력이 있었음을 주시한 건 혁명이자 친일매국에 안일했던 우리의 도덕적 해이에 대한 준엄한 경고라 숭고하다.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 접근하려는 장엄한 시도다.

완택이 자신에게 반발하는 정환에게 한 “너는 조선이 독립될 것 같니?”라는 대사는 ‘밀정’의 이정출에게서 빌렸지만 이어지는 “친일이 아닌 애국이야. 조선이 사라진 지가 언젠데”라는 후속 대사가 촌철살인이다. 이 한마디엔 생존전략과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덕진은 또 다른 완택이다.

▲ 영화 <말모이> 스틸 이미지

이씨조선은 외교와 내치 등 정치의 총체적 패착으로 망했다. 군주제는 시대적 흐름에 따라 폐기됐고,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됐던 민주주의가 정답이라는 걸 입증했다. 물론 완택과 덕진은 민주주의를 찾는 용틀임 대신 복종을 선택했지만 그들의 굴종엔 나름의 생존의 전략과 조선에 대한 항의는 있다.

그 숙제는 개인적 안위  대신 대의명분을 택한 정환과 무식한 전과자에서 우리말 지킴이로 환골탈태한 판수가 맡는다. 특히 판수의 친구들이 ‘동지’로 합류하는 과정은 드라마틱한 감동과 반전의 전율을 안긴다. 완택과 덕진이 존재론의 폐기를 택했다면 다른 쪽은 한민족이란 구조주의를 믿었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페르디낭 드 소쉬르 혹은 롤랑 바르트를 추구한 건 획기적이다. 독립운동 소재의 영화는 많았지만 기호 언어학은 처음이다. 소쉬르는 랑그(언어)와 파롤(말)의 기호학을 창시했다. 한글어학회가 노력하는 건 전국의 파롤(사투리)을 모아 랑그(표준어)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바르트는 더 나아가 사회의 모든 현상과 형상에 대해 이 이론을 적용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선 여자가 아침상을 차릴 때 남자는 신문을 읽는다. 매체는 이를 반복함으로써 남녀의 불평등을 평등화, 일상화시킨다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영악하게도 이 기호학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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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선 정신을 뿌리 뽑아야 하는데 말이 곧 정신”이란 대사다. 언중은 같은 말을 쓰는 집단을 뜻한다. 동일 언어를 통해 동질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그게 곧 사물의 의미는 개별이 아닌 전체 체계 안에서의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 따라 규정된다는 구조주의다.

우리에겐 아직도 백의민족이란 인식이 잔존해있다. 파롤의 구조주의다. 조선어학회는 그런 걸 명징한 말모이(랑그)로 명증하려 했던 것이다. 덕진이 창씨개명을 한 건 주도적인 존재론적 존재상실이다. 그의 본래적 존재의 현존화도, 판수에 의해 현존재화된 덕진도 모두 버리고 일본화하는 것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미장센은 사랑이란 애국심이고, 돈이란 친일이라는 메타포다. 당시 사면초가에 몰린 우리 국민들의 참담한 현실이다. “도시락이든 벤또든 배만 부르면 되지, 뭔 상관이냐”던 판수가 ‘후려치다’와 ‘휘갈기다’ 등의 파롤을 랑그로 만드는 과정은 우리 국민의 실존이자 탈존이다.

말의 독립운동이 큰 뿌리라면 부성애가 곁가지다. “너네들 아버지라는 것만으로도 미안하다"라는 판수는 조선시대의, 현대의 아버지의 자화상. 그의 본디적 존재화는 우리 국민의 계몽화고, 그건 ‘반달’이란 동요로 은유화된다. 흔하다는 문들레가 어원인 민들레는 민초의 힘의 알레고리.

당시 창씨개명에 앞장섰던 이광수 등 친일파 문인들을 조롱하는 골계미. 한글을 배우는 판수가 성냥으로 ㄱ, ㄴ, ㄷ 등을 만들다가 ㅇ 자리에 소주잔을 얹는 우아미. 우정출연한 유재명과 최귀화의 비장미. 12살 이상 관람 가는 이해불가, 두루두루 단체관람 강력 추천! 내년 1월 9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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