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스윙키즈>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과속스캔들’과 ‘써니’로 코미디에 강세를 보인 뒤 ‘타짜-신의 손’으로 스케일의 확장마저 성공한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는 썩 괜찮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정작 흥행에선 ‘범블비’ ‘아쿠아맨’은 물론 ‘마약왕’과 개봉한 지 한참 된 ‘보헤미안 랩소디’에조차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153억 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작품의 평가와 흥행이 다른 표리부동의 현상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같다. 관람한 관객들의 반응은 긍정이 강세다. 재미와 감흥, 메시지까지 모두 잡았다는 내용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다수의 관객은 쉽게 예매표를 클릭하지 않는다. 그건 아날로그적 코드 탓이다.

아날로그 코드로 따지면 ‘보헤미안 랩소디’는 이항대립이겠지만 사실 속사정은 다르다. 퀸은 이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 팝팬들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는 슈퍼스타고, 그들의 수많은 히트곡은 스테디셀러다. 게다가 이 영화는 마치 ‘록키 호러 픽쳐 쇼’ 같은 콘서트의 현장감이 강점이다.

‘아쿠아맨’은 그보다 더 구닥다리인 신화에 근거하지만 과학을 비웃는 판타지라는 강력한 핵무기를 장착했다. 아날로그는 해체가 간단하지만 신화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대부분의 신화는 문화적으로 해석되며 픽션으로 이해되지만 아틀란티스 신화는 진위 여부가 불분명해 더욱 흥미롭다.

▲ 영화 <아쿠아맨> 스틸 이미지

‘스윙 키즈’는 분명히 강점이 많이 탑재된 보잉 여객기다. 문제는 현대의 대중은 이미 달나라 여행을 예매할 만큼 첨단 디지털 문화로 앞서 내달린다는 점이다. 탭댄스는 미국의 흑인들이 아일랜드의 클로그 댄스를 조합해 재즈와 결합시켜 1920년대 크게 유행시킨 춤으로 이후 탱고와도 잘 어울렸다.

영화에도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이 하이라이트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 재즈는 거리가 있고, 탭댄스는 고색창연하고 비현실적이다. 특히 현재 한국의 춤과 음악은 막춤과 힙합, 트로트와 랩의 이원론밖에 없다. 다원론이 끼어들 틈이 없이 양극의 대척점만 존재할 따름이다.

재즈가 아무리 고상하면서도 매우 관능적(어원은 성행위)이어서 고차원적 흥을 돋우는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10~30대에겐 시대착오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더 크다. 탭댄스는 일단 쇠붙이를 덧댄 신발이 필수라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다. 현실적 레저 댄스스포츠를 소재로 한 ‘땐뽀클럽’마저도 최저 시청률이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념 다툼, 인종차별, 성차별 등의 훌륭한 메시지가 젊은이들에게 비현실적이거나 각자 의견이 달라 총합이 난해하다는 점이다. 일단 자본주의 대 공산주의, 백인 대 흑인, 남성 대 여성이란 대립쌍들의 갈등을 함께 다룬 연출 의도는 매우 훌륭했다.

▲ 영화 <마약왕> 스틸 이미지

그러나 젊은 관객들은 이미 자본주의에 익숙해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아예 못 봤다. 그래서 로기수의 탭댄스에 대한 열정과 그 때문에 발생하는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또 흑인문화를 주류로 알기에 잭슨의 소외감이 생소하다.

케케묵은 구악인 남존여비에 대한 코드를 심긴 했지만 판래의 “미국의 인종차별보다 한국의 여성차별이 더 심하다"라는 대사가 가진 깊은 의미를 관객의 인식 깊은 곳까지 배달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는 점에서 그 장치적 배려는 아쉽다. 기수, 판래, 잭슨이 탭댄스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설명이 부족한 것.

즉 티케팅을 망설이는 다수의 젊은이들은 이미 관람한 지인의 설명에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고, 재미없다고 평가한 이미 관람한 이들은 감독의 의도를 공명하다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스윙키즈’는 이토록 본래적(태생적) 매력에도 불구하고 비본래적(생래적) 정체성의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그러나 그 장벽은 감독 등 제작진의 책임은 아니다. 기초적으로는 인간성의 본질을 외면한 교육의 현실부터 더 나아가 밴드가 사라지고 후크송이 주류를 이루는 문화를 만든 작가와 장사치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을 제 주머니의 선전물쯤으로 전락시킨 정치 모사꾼 및 지도층들의 비뚤어진 욕심 탓이다.

▲ 영화 <범블비> 스틸 이미지

적어도 문화와 예술은 정치와 경제보다 거룩한 사회적 층위개념이라는 주체의식과 인간이 동물과 구분될 수 있는 언어와 문자만큼의 숭고함과 우아함을 갖춘 영적인 환희란 교육이 실종된 탓이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종교 비판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영혼을 죽였다는 뜻인데.

존 스튜어트 밀은 ‘국가의 무오류성 가정’과 ‘보편적 진리의 완전무결성 가정’의 오류를 경고하며 편견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개개인의 다양성 발전이 가장 절대적이고 본질적이라는 공리주의 사회를 최고선으로 강조했다. 밀에 의거하면 모든 영화는 완벽할 수 없지만 다양성은 필수다. 소수의견까지.

영화는 예술(감독)과 상업(투자사)이 공존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교묘한 결혼의 결과다.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의 선택권이다. 돌올한 영화도, 비루한 영화도(그런 표현들 자체가 모순이지만) 필요하다. ‘마약왕’과 ‘스윙키즈’의 단점이 지적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영화가 없어진다면 곤란하다.

그 생존의 기저는 문화는 다양성이고, 기반은 관객의 취향성이다. 문제는 자본과 감독 사이의 교감과 합의다. 과연 우리의 인구와 스크린 대비 100억 원이 훌쩍 넘는 영화가 그렇게 많아도 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만약 ‘스윙키즈’의 제작비가 절반 이하였다면? 유물론과 관념론의 절충!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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