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12.12거사는 4일전 경복궁 30단 예비모임에서 시작됐다.
1979년 12월8일 오전 국방부 청사에서는 차관주재회의가 열렸다. 국방부 간부들이 갖는 통상적인 회의였다. 회의가 끝나자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방산차관보인 이범준 장군에게 오늘 저녁자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유 장군은 “그 약속을 무조건 취소하고 나랑 저녁하러 갑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왜 막무가내로 만나자고 했을까.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날 저녁 경복궁 30단에서 비밀모임이 있었다. 신군부 핵심들이 예비모임을 가진 날이었다. 그들 중 이 장군과 절친한 유 장군에게 이 장군을 끌어들이도록 하기로 했던 것도 나중에 알았다.
이 장군의 증언내용에는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12.12쿠데타는 거사 4일 전 경복궁 30단에서 주체적 예비모임을 갖고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준비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범준 장군은 12.12 총성이 울리던 날 국방부 청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장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장군은 12.12 당시의 국방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역사의 증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2월12일 저녁 8시쯤. 이 장군은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국방부 상황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 장군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국방부 청사로 향했다. 8시30분, 국방부장관실에 올라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지하벙커로 내려갔다. 김용휴(金容烋 육사7기)국방차관이 막 도착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이 장군이 묻자 김 차관은 “정승화 총장이 잡혀 갔소. 더 이상 정확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깜짝 놀라며 “그럼 장관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김 차관은 고개만 흔들며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둘의 대화는 계속됐다.
“어떻게 된거요? 혁명이오, 반란이오?”
“차관님, 육군총장을 잡아가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나도 그런 생각이오.”
잠시 후 유병현(柳炳賢 육사7기 특별)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이 도착했다. 유 부사령관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군내부가 어수선하며 빨리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데에 동감했다. 이 무렵 공수부대가 국방부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세 사람은 서둘러 장관실로 자리를 옮겼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여전히 부재 중이었다.
장관실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된 밤 11시 유학성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장군과 유 장군은 평소 친하게 지냈다. 이 장군이 수화기를 들었다. “유 장군, 어떻게 된거요. 군사혁명이오, 반란이오?” 유 장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유 장군이 전화를 건 것은 국방부내의 분위기를 파악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유 장군이 대답했다. “군사혁명이 아니오.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갔다가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이 장군이 다시 물었다. “유 장군, 현재 위치가 어디요?” “수경사에 있소.” 정확한 위치는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수경사라고만 했다.
유 장군과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장군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차라리 ‘혁명상황’이라면 찬성과 반대 중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히 입장표명을 할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가슴만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즈음 윤성민 육참차장이 장관실에 도착했다. 윤 차장은 “저들이 총장을 잡아갔습니다. 이건 명백한 불법입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는 또 “육본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저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이 장군이 “그렇다면 윤 차장, 공수부대가 동원됐다고 하는데 우선 이를 막아야 할 것 아니오.” 윤 차장도 이에 동감했다. 그러면서 유혈충돌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에 이 장군은 “윤차장, 정병주 특전사령관과는 동기가 아니요. 그러니 병력충돌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 것 같소.” 그러자 윤 차장은 수화기를 들고 정 사령관을 찾았다. “정 장군, 큰일 났소. 공수부대가 이쪽을 향해 출동한 것 같소. 빨리 막지 않으면 충돌이 생깁니다.”라고 말했다. “윤 차장, 그런데 통신이 되질 않아요. 예하 지휘관을 아무리 불러도 소재파악이 안돼요.” 정 사령관은 매우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윤 차장은 “정 장군, 다른 여단이라도 동원해서 우선 막아야 합니다. 1공수가 지금 육본으로 오고 있소.” 통화를 마친 윤 차장은 육본지휘부를 수경사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빨리 삼청동공관으로 와서 상황보고를 해달라.”
잠시 후 노재현 장관이 김종환(金鍾煥 육사4기)합참의장과 함께 장관실로 들어왔다. 다른 장성들도 속속 도착했다. 김용휴 차관, 777부대장 김용금(金容今 육사7기)중장, 합참작전국장 이경률(李景律 육사10기) 소장 등 국방부와 합참의 고위장성들이 거의 다 모였다. 국방부 소속 중에 경복궁 30단에 간 유학성 차관보만 빠져 있었다.
노재현 장관은 장관실로 들어오자마자 사태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경복궁 30단에 있는 전두환 소장을 급히 찾았다. 어떻게 해서든 수습책을 강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 소장은 “알았다.”고만 전해 왔을 뿐 감감 무소식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노 장관은 유학성 차관보를 찾았다. 노 장관은 “군사혁명이냐?”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유학성 차관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총리공관과 직통으로 연결된 비상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긴급상황이 발생한 지 5시만에 군 최고 지휘자간의 통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총리공관에서는 “빨리 공관으로 와서 상황을 보고해달라.”고 재촉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하자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실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른 다음 새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는 동안 대통령 대행이나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3개월 후 8월16일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바로 이 시각,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金棅斗 갑종35기)대령은 전두환 소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박희도 장군이 이끄는 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와 육본에 동시에 투입되니 아군끼리 충돌이 없도록 사전 교통정리를 잘 해놓으라는 내용이었다. 김병두 대령은 즉시 육본 사령실과 국방부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계엄군이 추가 배치사실을 알리며 1공수여단이 진입시 사격을 가하지 말라고 했다.
잠시 후 노재현 장관이 삼청동 공관으로 향할 즈음 국방부 청사 정문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느새 1공수여단이 국방부에 도착해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노 장관은 총소리를 듣더니 수행부관 1명과 함께 장관실 안쪽 비상구를 이용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노 장관이 막 나가려는 순간 장관실 출입구에서 수발의 총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출입문이 박살난 것도 이 때였다. 다행히 이 장군 등이 출입구 오른쪽에 앉아 있어서 총탄에 맞지는 않았다.
곧이어 공수부대 병력이 장관실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하사계급장을 단 병사 2명이 M16소총을 겨눴다. 유병현 장군이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이 계급장 안보이냐. 어디에다 총을 겨누는 것이야. 너 몇 살이야?” “22살입니다.” “내 막내 아들과 동갑이구나. 너희 대장 데리고 와라.” 잠시 후 중령 한 명이 들어왔다. 1공수 5대대장 박덕화(朴德和) 중령이었다. 유 장군은 박 중령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병력을 철수해.” 그러나 박 중령은 “저는 상관의 명령에 의해 죽고 삽니다. 직속속상관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유병현 장군이 다시 말했다. “너의 상관이 누구냐?” “박희도 여단장입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박희도 준장은 이 때 육본 본부사령실에서 국방부와 육본상황 등을 경복궁 30단의 전두환 소장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있었다. 유 장군이 박희도 준장과 통화가 이루어진 것은 잠시 뒤였다. “박 준장, 지금 빨리 와서 수습을 해라.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 장관실이 박살났다.” “알겠습니다” 장관실에 있던 장성들은 박희도 준장만 오기를 기다렸다. 김용휴 차관은 기다리다가 “수경사로 건너가겠다”며 장관실을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국방부 점령을 명 받았습니다.”
박희도 준장이 장관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쯤이었다. 박 준장이 경례를 붙이며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국방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준장이 들어오자 병사들은 밖으로 나갔다. 장관실에는 유병현 장군, 이범준 장군, 박 준장 등 3명뿐이었다. 유 장군 등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 때 삼청동 공관과 보안사령관실로부터 국방부장관을 빨리 찾으라는 독촉전화가 여러번 걸려 왔다. 유 장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는지 북한의 동향을 파악해봐야겠다면서 미8군 벙커로 가버렸다. 남아 있는 사람은 이 장군과 박 준장. 둘은 초면이었다. 한참동안 팽팽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이 장군이 “자네 육사 몇기인가?” “12기입니다.” “나보다 4년이 늦구만.”
잠시 후 이 장군이 말했다.
“지금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달린 순간이다. 국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좋은 결과가 오면 좋게 생각할 일이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잡아놓고 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 아니냐. 만약 결과가 잘못되어 일어날 막중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역사의 심판은 냉엄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 준장은 목이 타는지 물을 연거푸 마시고 답배도 피웠다.
“그 날 박 준장과 국방부장관실에서 같이 앉아 있던 시간은 새벽 2시부터 6시까지였습니다. 그는 물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마시고 담배를 3갑이나 피워댈 정도로 불안해 했습니다.그러는 사이 전두환 장군에게 상황보고를 하곤 했지요. 박 준장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날 첫만남 이후 나는 곧 전역을 했고 박 준장은 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