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mbc 화면 캡처

12.12거사는 4일전 경복궁 30단 예비모임에서 시작됐다.

1979년 12월8일 오전 국방부 청사에서는 차관주재회의가 열렸다. 국방부 간부들이 갖는 통상적인 회의였다. 회의가 끝나자 유학성 군수차관보가 방산차관보인 이범준 장군에게 오늘 저녁자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선약이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자 유 장군은 “그 약속을 무조건 취소하고 나랑 저녁하러 갑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취소할 수 없다고 했다. 왜 막무가내로 만나자고 했을까.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날 저녁 경복궁 30단에서 비밀모임이 있었다. 신군부 핵심들이 예비모임을 가진 날이었다. 그들 중 이 장군과 절친한 유 장군에게 이 장군을 끌어들이도록 하기로 했던 것도 나중에 알았다.

이 장군의 증언내용에는 중요한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12.12쿠데타는 거사 4일 전 경복궁 30단에서 주체적 예비모임을 갖고 치밀한 시나리오에 의해 준비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이범준 장군은 12.12 총성이 울리던 날 국방부 청사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유일한 장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장군은 12.12 당시의 국방부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역사의 증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2월12일 저녁 8시쯤. 이 장군은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쉬고 있었다. 이 때 국방부 상황실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비상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 장군은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국방부 청사로 향했다. 8시30분, 국방부장관실에 올라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지하벙커로 내려갔다. 김용휴(金容烋 육사7기)국방차관이 막 도착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고 이 장군이 묻자 김 차관은 “정승화 총장이 잡혀 갔소. 더 이상 정확한 것은 나도 잘 모르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장군은 깜짝 놀라며 “그럼 장관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김 차관은 고개만 흔들며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둘의 대화는 계속됐다.

“어떻게 된거요? 혁명이오, 반란이오?”
“차관님, 육군총장을 잡아가는 게 말이나 됩니까?”
“나도 그런 생각이오.”

잠시 후 유병현(柳炳賢 육사7기 특별) 한미연합사부사령관이 도착했다. 유 부사령관도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군내부가 어수선하며 빨리 질서를 잡아야 한다는 데에 동감했다. 이 무렵 공수부대가 국방부를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세 사람은 서둘러 장관실로 자리를 옮겼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여전히 부재 중이었다.

장관실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된 밤 11시 유학성 장군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장군과 유 장군은 평소 친하게 지냈다. 이 장군이 수화기를 들었다. “유 장군, 어떻게 된거요. 군사혁명이오, 반란이오?” 유 장군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유 장군이 전화를 건 것은 국방부내의 분위기를 파악해보려는 심산이었다. 유 장군이 대답했다. “군사혁명이 아니오. 정 총장을 연행하러 갔다가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이 장군이 다시 물었다. “유 장군, 현재 위치가 어디요?” “수경사에 있소.” 정확한 위치는 가르쳐주지 않고 그냥 수경사라고만 했다.

유 장군과 통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장군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차라리 ‘혁명상황’이라면 찬성과 반대 중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히 입장표명을 할텐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가슴만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즈음 윤성민 육참차장이 장관실에 도착했다. 윤 차장은 “저들이 총장을 잡아갔습니다. 이건 명백한 불법입니다.”며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는 또 “육본병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저지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이 장군이 “그렇다면 윤 차장, 공수부대가 동원됐다고 하는데 우선 이를 막아야 할 것 아니오.” 윤 차장도 이에 동감했다. 그러면서 유혈충돌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에 이 장군은 “윤차장, 정병주 특전사령관과는 동기가 아니요. 그러니 병력충돌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인 것 같소.” 그러자 윤 차장은 수화기를 들고 정 사령관을 찾았다. “정 장군, 큰일 났소. 공수부대가 이쪽을 향해 출동한 것 같소. 빨리 막지 않으면 충돌이 생깁니다.”라고 말했다. “윤 차장, 그런데 통신이 되질 않아요. 예하 지휘관을 아무리 불러도 소재파악이 안돼요.” 정 사령관은 매우 답답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윤 차장은 “정 장군, 다른 여단이라도 동원해서 우선 막아야 합니다. 1공수가 지금 육본으로 오고 있소.” 통화를 마친 윤 차장은 육본지휘부를 수경사로 옮겨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떠났다.

“빨리 삼청동공관으로 와서 상황보고를 해달라.”

▲ 사진=mbc 화면 캡처

잠시 후 노재현 장관이 김종환(金鍾煥 육사4기)합참의장과 함께 장관실로 들어왔다. 다른 장성들도 속속 도착했다. 김용휴 차관, 777부대장 김용금(金容今 육사7기)중장, 합참작전국장 이경률(李景律 육사10기) 소장 등 국방부와 합참의 고위장성들이 거의 다 모였다. 국방부 소속 중에 경복궁 30단에 간 유학성 차관보만 빠져 있었다.

노재현 장관은 장관실로 들어오자마자 사태의 진상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경복궁 30단에 있는 전두환 소장을 급히 찾았다. 어떻게 해서든 수습책을 강구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 소장은 “알았다.”고만 전해 왔을 뿐 감감 무소식이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노 장관은 유학성 차관보를 찾았다. 노 장관은 “군사혁명이냐?”고 반복해서 물었지만 유학성 차관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총리공관과 직통으로 연결된 비상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최규하 대통령이었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긴급상황이 발생한 지 5시만에 군 최고 지휘자간의 통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었다. 총리공관에서는 “빨리 공관으로 와서 상황을 보고해달라.”고 재촉했다. (10월 26일, 박정희가 사망하자 최규하 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고, 같은 해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권한대행 시절이던 1979년 11월10일 특별담화를 통해 제4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우선 선출하되, 새 대통령은 가능한 한 빠른 기간 안에 민주헌법으로 개정한 후 이에 따라 다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담화문은 야당 정치인을 포함해 모든 국민의 환영을 받았으며 최규하 권한대행이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대내외적으로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따라서 실제 새로운 민주적 헌법을 마련하고 그에 따른 선거를 치른 다음 새 정부에 무사히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17 내란으로 권력을 모두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무력 진압하는 동안 대통령 대행이나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전혀 행사하지 못했다. 3개월 후 8월16일 대통령에서 사임했다.)

바로 이 시각, 국방부 보안부대장 김병두(金棅斗 갑종35기)대령은 전두환 소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박희도 장군이 이끄는 1공수여단 병력이 국방부와 육본에 동시에 투입되니 아군끼리 충돌이 없도록 사전 교통정리를 잘 해놓으라는 내용이었다. 김병두 대령은 즉시 육본 사령실과 국방부 당직실에 전화를 걸어 계엄군이 추가 배치사실을 알리며 1공수여단이 진입시 사격을 가하지 말라고 했다.

잠시 후 노재현 장관이 삼청동 공관으로 향할 즈음 국방부 청사 정문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어느새 1공수여단이 국방부에 도착해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노 장관은 총소리를 듣더니 수행부관 1명과 함께 장관실 안쪽 비상구를 이용해 황급히 자리를 떴다. 노 장관이 막 나가려는 순간 장관실 출입구에서 수발의 총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출입문이 박살난 것도 이 때였다. 다행히 이 장군 등이 출입구 오른쪽에 앉아 있어서 총탄에 맞지는 않았다.

곧이어 공수부대 병력이 장관실 출입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하사계급장을 단 병사 2명이 M16소총을 겨눴다. 유병현 장군이 호통을 쳤다. “야 이놈아, 이 계급장 안보이냐. 어디에다 총을 겨누는 것이야. 너 몇 살이야?” “22살입니다.” “내 막내 아들과 동갑이구나. 너희 대장 데리고 와라.” 잠시 후 중령 한 명이 들어왔다. 1공수 5대대장 박덕화(朴德和) 중령이었다. 유 장군은 박 중령에게 “이게 무슨 짓이냐. 병력을 철수해.” 그러나 박 중령은 “저는 상관의 명령에 의해 죽고 삽니다. 직속속상관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유병현 장군이 다시 말했다. “너의 상관이 누구냐?” “박희도 여단장입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박희도 준장은 이 때 육본 본부사령실에서 국방부와 육본상황 등을 경복궁 30단의 전두환 소장에게 일일이 보고하고 있었다. 유 장군이 박희도 준장과 통화가 이루어진 것은 잠시 뒤였다. “박 준장, 지금 빨리 와서 수습을 해라. 병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게 말이 되느냐. 장관실이 박살났다.” “알겠습니다” 장관실에 있던 장성들은 박희도 준장만 오기를 기다렸다. 김용휴 차관은 기다리다가 “수경사로 건너가겠다”며 장관실을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국방부 점령을 명 받았습니다.”

▲ 사진=mbc 화면 캡처

박희도 준장이 장관실에 도착한 것은 새벽 2시쯤이었다. 박 준장이 경례를 붙이며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국방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준장이 들어오자 병사들은 밖으로 나갔다. 장관실에는 유병현 장군, 이범준 장군, 박 준장 등 3명뿐이었다. 유 장군 등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 때 삼청동 공관과 보안사령관실로부터 국방부장관을 빨리 찾으라는 독촉전화가 여러번 걸려 왔다. 유 장군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예감했는지 북한의 동향을 파악해봐야겠다면서 미8군 벙커로 가버렸다. 남아 있는 사람은 이 장군과 박 준장. 둘은 초면이었다. 한참동안 팽팽한 긴장감만 감돌았다. 이 장군이 “자네 육사 몇기인가?” “12기입니다.” “나보다 4년이 늦구만.”

잠시 후 이 장군이 말했다.

“지금은 국가의 흥망성쇠가 달린 순간이다. 국민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좋은 결과가 오면 좋게 생각할 일이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잡아놓고 하는 것은 시작부터 잘못된 것 아니냐. 만약 결과가 잘못되어 일어날 막중한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것인가. 역사의 심판은 냉엄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박 준장은 목이 타는지 물을 연거푸 마시고 답배도 피웠다.

“그 날 박 준장과 국방부장관실에서 같이 앉아 있던 시간은 새벽 2시부터 6시까지였습니다. 그는 물 한 주전자를 거의 다 마시고 담배를 3갑이나 피워댈 정도로 불안해 했습니다.그러는 사이 전두환 장군에게 상황보고를 하곤 했지요. 박 준장에게 무슨 일을 하더라도 국가의 장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날 첫만남 이후 나는 곧 전역을 했고 박 준장은 참모총장까지 승승장구했습니다.”

▲ 김문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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