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경고 1, 영화 ‘가버나움’(나딘 라바키 감독)을 보고 나면 한동안 자신의 행운 혹은 행복이 미안할 것이다. 2, 지금까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경박하거나 천박했다고 자책할 것이다. 3, 자꾸 주변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강권하는 바람에 ‘왕따’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볼 가치가 충분한 마스터피스다.

내전이 한창인 레바논. 복잡한 도시 빈민가에서 부모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함께 사는 12살인지 13살인지 나이도 모르는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 많은 동생 중에서도 유독 바로 밑의 여동생 사하르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어느 날 그녀의 초경을 알게 된 자인은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분주해진다.

그러나 결국 사하르가 시집갈 때(?)가 된 걸 알게 된 부모는 능글능글한 청년 아사드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낸다. 이를 극구 반대하던 자인은 부모에게 폭력으로 저지를 당한 뒤 가출한다. 버스 안에서 ‘카크로우취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와 한자리에 앉게 된 그는 이끌리듯 뒤를 따라 유원지에서 내린다.

그곳에서 이리저리 일자리를 구하러 헤매다가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을 만나 그녀의 집으로 간다. 라힐은 1살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와 함께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뼈 빠지게 돈을 벌어 가짜 체류증을 갱신하는 데 쓰고 고향 엄마의 생활비까지 보태주는 것.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일하러 나간 라힐을 대신해 자연스레 자인은 요나스의 보모가 된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하고 하루하루가 불안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일상을 살던 세 식구에게 위기가 닥친다. 일하러 나갔던 라힐이 경찰의 단속에 걸려 구금된 것. 이를 알 리 없는 자인은 요나스에게 자신의 엄마와 똑같다고 비난한다.

당장 먹고 마실 게 떨어지자 자인은 강탈한 스케이트보드에 요나스를 태워 끌고 다니며 라힐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가운데 먹을 걸 구하느라 애쓴다. 그러다가 사하르가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그는 부모가 만류할 틈도 없이 뛰쳐나가 아사드에게 상해를 가한 뒤 법정에 서게 되는데.

가버나움은 예수에게 베들레헴-나사렛을 이은 고향이다. 신약성서에서 보듯 기적과 멸망이란 양극단의 은혜와 저주가 공존하는 곳이다. 레바논은 이스라엘과 다르지만 내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상황을 빗댄 것이다. 영화는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하며 시작된다.

어린이의 손목에 수갑이 내걸리고 갓난아이는 유모차에 족쇄가 채워진 채 바동거린다. 어린 동생이 초경을 시작하자 오빠가 팬티를 빨아주고 자신의 티셔츠로 생리대를 대신한다. 그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부모가 주인집 아들에게 강제로 시집보낼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다.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드론으로 잡은 빈민촌의 지붕 위엔 폐타이어가 빼곡히 박혀있다. 수도를 틀면 시뻘건 녹물만 쫄쫄 흐를 뿐이고, 거리엔 뿌연 먼지만 흩날린다. 도대체 이게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얘기인지 의아할 정도로 그들의 삶은 황폐하고 피폐하다. 더 처참한 건 벌떼 같은 아이들의 방치와 학대다.

11살 소녀가 성의 노리개인가, 아이 낳는 기계인가? 불과 11살의 사하르는 단지 가족이 ‘먹고사는’ 이유로 팔려가다시피 강제로 시집을 간다. 가자마자 임신한 그녀는 하혈이 심해 병원을 찾지만 끝내 입원치료를 거부당한 채 숨을 거둔다. 출생신고서가 없다는 이유로. 무적자이기에.

영화는 인권유린 차원을 넘어서 아동학대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엄마가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준다”라며 사하르의 죽음 뒤 아이를 가졌다고 자신들의 무책임을 알라에게 돌리자 자인은 “뱃속의 아이도 나처럼 되니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엄만 감정도 없나 봐요”라고 재판관에게 호소한다.

“애들을 안 돌보는 부모, 지긋지긋하다"라는 그의 말 한마디는 무책임하고 철딱서니 없는 후진국의 국민들과 더 나아가 그 국민들을 제대로 계도하지 못하는 정부를 준엄하게 꾸짖는다. 우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의 빈민촌은 흡사 우리네 그런 부류와 비슷하다. “제 먹을 건 타고 난다"라는 무책임한 성욕.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나도 이렇게 나서 자랐을 뿐”이라며 “가정 꾸린 게 후회돼. 등골만 휘어”라는 아버지의 말은 아마 그 빈민촌 대다수 아버지의 어긋난 변명일 것이다. 영화의 뼈대는 사하르의 엄마와 요나스의 엄마다. 요나스를 팔면 제 몸 하나 편안할 테지만 사수하는 엄마와 사하르를 팔아 연명하려는 엄마의 극명한 대비.

유원지에서 표류하던 자인이 커다란 여자 조형물의 상의를 벗겨 젖가슴이 드러나게 만드는 시퀀스는 아무런 책임 없이 아이를 낳은 뒤 방치하고 학대하며 상품 취급하는 어른들이 버젓하게 살아가는 그 세상에 대한 조롱이자 자그마한 반항이다. 그 세상을 살아야만 하는 번뇌의 몸부림이다.

자인의 보살핌을 받는 요나스가 수시로 자인의 가슴을 더듬는 건 버림받은 아이들의 모성과 부성을 향한 단장의 호소다. 스파이더맨을 흉내 낸 바퀴벌레맨 복장을 한 할아버지는 그렇게 어른인 척하는 어린이보다 못한 부모를 비웃는 알레고리다.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 부모를 고발하는 자식.

굳이 우라노스와 크로노스, 그리고 제우스를 들지 않더라도 그리스신화에서 숱하게 봐온 가족사의 비극의 전형이지만 그게 생존이라는 허울을 쓴 이기심과 무책임과 저급한 본능의 발로라는 영화의 배경은 참으로 무참해서 분노를 폭등케 한다. 아이들의 눈물과 미소가 오랫동안 남는 가슴 아픈 걸작이다.

사족; 실제 난민인 주인공들은 영화 촬영 이후 ‘주민등록증’을 갖게 됐다. 영화 마지막 자인과 사진작가의 왼쪽과 오른쪽의 차이는 모든 이념을 초월한 인본주의를 주창하는 메시지다. 굳이 백인과 유사한 중동 소년과 아프리카 흑인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는 아주 명백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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