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mbc 화면 캡처

“군이 데모진압에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12.12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넘은 1980년 5월16일 국방부에서 군단장급 이상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긴급소집됐다. 원래 회의장소는 국방부장관실이었으나 육참총장은 미리 총장실에 모이도록 했다. 주요 지휘관들은 총장으로부터 “오늘의 안건은 데모진압에 군을 투입할 것이냐 하는 문제”라는 얘기를 들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군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쑤군댔다. 강력하게 밀어붙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 중 3군단장 전성각 장군은 “군이 데모진압에 나선다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리고 “군이 전투장비를 가지고 데모를 진압하는 것은 넌센스다.”라고 반대입장을 표명하며 4.19때 왜 군대가 데모진압을 못했는지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또 전 장군은 특유의 합리적 성격대로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럴려면 국민한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당시 총장실에 모여 미리 토의과정을 거친 것은 순전히 그 날의 국방부장관 주재 회의에 앞서 의견을 통일해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이 날 회의가 바로 5.17계엄확대조치를 위한 서막이었다.

그렇다면 숨가쁘게 돌아갔던 이 날의 회의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그러니까 16일 오후 2시 국방부장관 회의실에서 주영복(周永福) 국방장관이 주재하는 전군 지휘관 회의가 시작됐다. 참석자는 육해공군 고위 지휘관 44명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청와대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는 바람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ㄷ자형 탁자가 놓여 있었고 맨중앙에 주영복 장관이 앉아 회의를 진행했다.

“국가적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북괴도발에 대비해야 할 시점에 학생들의 데모 등으로 사회가 혼란해져가고 있습니다. 군이 이제 나서서 수습을 해야 한다는 뜻에서 여러분들의 의견을 모아 대통령의 재가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장군이 없었다. 서로의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러자 주 장관이 회의를 주도해 나갔다.

“사회혼란을 야기시키는 불순분자들이 많습니다. 이 기회에 군이 적극 나서서 수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보수성향을 띠는 군인집단이 북한의 위협속에 사회혼란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수습에 나서겠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때 군수기지사령관 안종훈(安宗勳)중장이 손을 번쩍들고 발언을 신청했다.

“군이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결과가 됩니다. 국민합의에 따라야 합니다. 전체 여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할 때 해야 합니다. 오늘의 회의가 현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미리 결정해놓고 하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안 중장의 발언은 회의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국민이 원하는 걸 어떻게 알고 그렇게 표현합니까?”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발언은 계속 이어졌다.

“현재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이것을 그냥 놔두면 점점 위험해집니다. 국회가 개헌되면 국가를 오도할 사례가 많아집니다. 소수 주장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다수가 군개입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전 장군은 “그날 회의는 군을 떠날 각오를 하지 않으면 반대의견을 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결국 총장실에서 의견을 개진했지만 참모총장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며 그에 따르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 날 참석한 주요 지휘관들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준비된 명부(실제 아무런 내용이 없는 백지였으나 군이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에 서명하는 것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안 중장 역시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안 중장은 그 해 8월 보직해임된 뒤 군복을 벗게 된다.

5.18전야 전국 일원으로 5.17계엄확대

▲ 사진=mbc 화면 캡처

이 날의 서명은 곧바로 결의안에 첨부되어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申鉉碻)국무총리에게 전달이 됐다. 이 결의안은 이 날 밤 긴급 소집됐던 국무회의에도 제출됐다. 이는 신군부측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5월17일 24시를 기해 정부대변인인 이규현(李揆現) 문공부장관은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는 내용을 공식발표(17일 밤 11시30분)했으며 18일 새벽 계엄사는 포고령 제10호를 발표했다. 정치활동 중지,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금지, 모든 대학의 휴교조치 등을 담은 내용이었다.

한편 보안사령부는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대상자 명단을 통보했으며 이튿날 전국 대학생대표자회의가 열리는 이화여대를 급습했다. 실로 사전 시나리오에 의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보안사령부는 16일 전군 보안부대 수사과장 회의를 소집해 17일 24시를 기해 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다는 사실과 검거대상자 명단을 통보했으며 이튿날 전국 대학생대표자회의가 열리는 이화여대를 급습했다. 실로 사전 시나리오에 의한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신군부는 소위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군대를 동원하여 국회 해산, 김대중 등 정치 인사체포, 대학교 휴교령, 정치 활동 금지,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보도 사전검열, 포고령 위반자 영장없는 체포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이른바 5.17쿠데타를 감행한 셈이다.

5.18의 피해자 통계 아직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아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5월18일 새벽 2시 특전사 7공수여단 800명이 전남대학교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아침 10시 공수부대원들이 지키고 있는 전남대 교문에 200여명의 학생이 모여들었고, 공수부대원들의 구타가 시작됐다. 다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학생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며 금남로로 이동했다. 이들은 오전 11시 30분 금남로에서 6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연좌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후 3시 40분 7공수여단이 유동 삼거리로 출동하여 학생과 시민들에 대하여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했다. 이 과정속에서 농아 김경철씨가 사망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부상당하고 죽고, 이러한 비극은 5월27일까지 계속 이어진다.

굳이 원인을 따지자면 5.18은 1979년 12.12 군사반란 이후부터 불씨가 당겨졌고 1980년 5월18일부터 5월27일까지 전두환 등 독재 군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로 죽인 학살 범죄가 일어나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건이라고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5.18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서울의 봄’으로 민주화 열기가 거세지자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로 맞서면서 생겨난다. 계엄령과 대학교들의 겨울방학, 연말이라는 점이 맞물리면서 이러한 분노는 잠시 머무는 듯하다가 대학들이 개학을 맞이한 3월 이후 안개정국에 대해 하나 둘씩 알려지면서 1980년 4월부터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끊이지 않았다.

▲ 사진=mbc 화면 캡처

전두환의 군사독재에 맞서 일어난 시위가 진압군과 격한 대립을 벌이는 과정에서 진압군과 광주시민들의 총격전으로 확산됐고 결국 진압은 되지만 불행하게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날의 1차 책임은 계엄군보다는 최종 결정권자이자 명령권자인 전두환과 군지휘관에 있다고들 말한다. 또한 당시 지휘계통상 책임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 겸직), 진종채 제2군사령관,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그리고 예하 부대 지휘관들로 되어 있으나, 미 국무부 비밀전문 등에 따르면 최종 진압작전을 결심한 책임자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피해는 어느 정도일까. 5.18 민주유공자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의 단체들이 발표한 통계 자료 등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165명이 항쟁 당시 숨졌으며, 행방불명이 65명(암매장 가능성으로 추정), 부상 후 사망 추정자 376명이다. 공식 인정된 부상자 경우만 해도 2392명이며, 1394명이 체포, 연행되어 고문당했다. 당시 신군부 발표에 의하면 사망자 162명, 총상으로 124명, 자상(칼) 11명, 타박상(구타) 18명 등이며, 초등학생 2명, 중학생 6명 등이 사망자로 되어 있다. 하지만 5.18 피해자의 통계는 아직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고 있다

5.18항쟁이 끝날 무렵인 1980년 5월31일, 이 날은 신군부에 의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정식으로 출범한 날이다. 이와 동시에 10.26 이후 권력의 혼란기를 틈타 발생한 12.12사건, 5.17계엄확대조치, 5.18 광주민주항쟁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사의 격랑도 외견상 가라앉는 듯 해다.

국보위 출범은 제5공화국 탄생의 전주곡이나 다름없다. 80년 4월 중앙정보부장서리까지 겸직하게 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국내외 모든 정보채널을 장악한 채 정국의 불안과 사회의 혼란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국보위는 어떤 배경에서 탄생됐을까.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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