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증인’은 ‘오빠 생각’(2016)으로 맥이 빠졌던 이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가장 빛낼 마스터피스가 될 듯하다. 힘 뺀 정우성과 더 빼서 더욱 강한 김향기의 서번트 증후군 연기가 두고두고 회자될 매우 재미있는 법정 드라마가 탄생했다. 미스터리 스릴에 유머와 감동까지 갖춘 작은 거인 같은 작품.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출신의 46살 노총각 순호는 늙은 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뒤늦게 출세를 하겠다고 대형 로펌에 들어가 드디어 대표 변호사의 눈에 들어 파트너 변호사로 승진할 기회를 잡는다. 10년 넘게 함께 산 주인 은태를 살해한 용의자인 가사도우미 미란의 국선 변호인을 맡게 된 것.

순호는 미란의 무죄를 믿고 열심히 뛰던 중 피해자의 아들 학영도 만난다. 그런데 대표 변호사가 학영이 운영하는 회사의 고문 변호사 계약을 맺어준다. 이제 이번 재판만 이기면 출세 가도에 올라타는 건 보증수표다.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여고생 지우를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는 게 마지막 숙제다.

자폐아 지우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웬만한 의사소통이 쉽지 않지만 청력, 기억력, 순발력 등에서 엄청난 초능력을 보인다. 순호는 퍼즐과 퀴즈 등을 통해 어렵게 한 걸음씩 그녀와의 소통을 이어가고 드디어 법정에 세우는 데 성공한다. 한편 순호의 아버지는 매일 그에게 결혼하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순호의 지근거리엔 대학 동창이자 민변 동료인 이혼녀 수인이 있다. 친구인 듯 애인인 듯 관계가 모호한 그녀와 오랜 시간 미묘한 우정을 이어오고 있다. 그녀는 최근 대형 생리대 회사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한 소비자 편에서 변호 중인데 생리대 회사 측 변호인은 순호 소속 로펌의 대표다.

내달 13일 개봉인데 23일 전에 언론 및 배급 시사회를 열었다. 배급사의 자신감이 충만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김향기가 일등공신인 것만큼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굿 닥터’의 주원이 거론되건 말건 김향기는 그녀만의 연기를 완성했다. 흥행작 ‘신과 함께’나 독립영화 ‘영주’는 비교가 실례다.

항상 잘생겨서 손해를 보는 정우성의 힘을 뺀 캐릭터는 어느 정도 안정감을 찾았는데 김향기의 클로즈업이 그걸 많이 돕는다. 엄마 역을 맡은 장영남의 존재감마저도 삼켜버릴 듯한 시선처리와 손짓 등의 디테일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게다가 법정 드라마의 클리셰가 있으면서도 결이 다른 게 큰 강점.

이 평범한 드라마가 의외로 재미있는 건 흥밋거리가 많기 때문. 우선 미란은 유죄인가, 무죄인가의 미스터리 스릴러. 과연 그날의 진실은 무엇인지 파헤쳐 가는 여정이 흥미진진하다. 당연히 열쇠는 지우다. 천재인지 장애인인지 보는 이에 따라 극과 극에 위치할 수 있는 그녀의 진면목이 관건이다.

▲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순호와 지우의 소통, 법정에서의 지우의 역할, 그리고 판사가 자폐아인 증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지 등도 은근한 중독성을 발휘한다. 그리고 유머. 파킨슨병을 앓는 아버지는 “어떻게 46년간 여자 한 명 안 데리고 오냐? 사람들이 네가 남자 좋아하냐고 묻더라. 남자라도 사람이면 괜찮다”라고 말한다.

지우의 언행 하나하나가 웃음과 눈물을 유발한다. 남들보다 특별해서 특이하게 비치지만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그녀만의 개별적인 세상은 귀엽고 재미있으며 아름답다. 유난히 청력이 좋은 그녀가 반갑다고 짖어대는 개의 울음을 오해하는 건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곡해를 뜻하는 알레고리다.

지우가 순호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고, 세상을 향해 “나는 정신병자입니까?”라고 묻는 게 영화의 주제다. ‘다른’ 걸 ‘틀리다’고 몰아붙이는 여론몰이, 소수의견이 묵살되는 프로파간다와 데마고기, 장애인이라는 손가락질 등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과연 올바른 세상일까? 그 사람들은 제정신일까?

모두가 배타적으로 멸시하는 지우에게도 유일한 친구 신애가 있다. 등하굣길을 돕고, 다른 학우들의 놀림과 괴롭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수호천사인 줄 알았던 그녀의 반전은 ‘울타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이 사회와 공권력의 추한 이면의 메타포다. 그건 곧 순호가 지닌 양면성과 갈등을 뜻하기도 한다.

▲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국보법 폐지, 양심수 석방’이란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던 민주투사 출신의 양심적 변호사는 이제 출세와 돈에 눈먼 ‘사기꾼’이 돼가는 중이다. 수인에게 ‘원칙 대신 실리를 취하는 게 바람직하니 생리대 보상금에 초점을 맞춰라’라고 조언하는 그는 ‘클라이언트가 법’이라는 자본의 논리에 굴복했다.

그 대척점에 선 수인은 “난 너처럼 안 변해. 우리 이제 그만 보자. 가는 길이 다르잖아”라며 양심을 따른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주장하는 ‘합리적, 경영적 산업 조직’의 이념이다. 노동자의 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 정신과 칼뱅주의적 윤리관에 근거한 사회를 추구하자는.

‘밖으로 나가기 힘든 사람과 소통하려면 거기로 들어가’라는 순리주의, “자폐만 아니면 좋았을(천재였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순호에게 “그랬다면 지우가 아니죠.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어요”라고 반발하는 엄마의 니힐리즘의 초극, “남 도와주는 착한 변호사가 꿈”이라는 지우의 순수주의가 모두 해당된다.

자신이 정신병자냐고 묻는 지우는 사실 세상 사람 다수가 비정상이라는 반어법이다. “특수학교 친구들 전부 이상해서 좋고 난 정상인 척 연기 안 해도 되니 좋다”라는 지우의 대사는 아프다. 인트로에서 바쁘지만 아우트로에서 여유가 생긴 순호는 자유의 상징. 소통과 화합과 치유의 영화다. 129분. 12살 이상.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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