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 만취 김복동의 위기일발, 이기백 장군이 구해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9.01.28l수정2019.02.0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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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선상 만취 김복동의 위기일발, 이기백 장군이 구해

이기백 장군은 5공화국 당시 실세로 군림했던 육사 11기 출신들과 돈독하게 지냈다. 주요 보직과 승진 등은 거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끈끈한 동기애로 술자리도 자주 가졌다. 이와 관련된 흥미 있는 일화가 있다.

1964년 여름이었다. 전방 등에서 근무하던 육사 11기 동기생들, 그러니까 전두환, 김복동, 이상훈, 이기백 소령 등이 진해에 있는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이들의 만남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각자 일선부대에서 맡은 일에 충실하느라 만나고 싶어도 여의치 않았던 이들은 진해 앞바다 남해를 바라보며 한 잔 술로 그동안의 회포를 풀며 못다한 우정을 나눴다. 특히 생도시절에도 이들은 비교적 호흡이 잘 맞는 사이였고 진해에서의 생활은 장차 허물없이 지내는 계기가 됐다. 이 중 한 사람은 최고 권좌에까지 올랐고 나머지 두 사람은 국방부장관까지 지냈다는 점에서 육대에서 새롭게 싹튼 ‘의리’는 실로 소중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기생들과 의기투합해 시간가는 줄 몰랐던 진해에서의 생활 중 이들에겐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아슬아슬했던 사건이 하나가 있었다.

그 무렵 어느 여름날 진해 앞바다에서 부부를 동반한 ‘선상파티’가 열렸다. 어느 요절작가가 쓴 ‘가든파티’처럼 낮부터 시작된 파티의 분위기는 서산에 해가 지면서 한층 무르익었다. 싱싱한 회를 안주로 거나하게 취한 이들은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어깨춤을 추기도 했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김복동 소령은 이미 취기가 몸 전체로 돌아 들썩들썩거리며 코믹한 몸짓을 지어보기도 했다. 갈매기들도 이 광경을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주위를 맴돌았다. 이 때 만취해서 중심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비틀거리고 있던 김복동 소령이 선미쪽 갑판 위에서 발을 헛디뎌 바다로 막 빠지려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불안하게 지켜보던 이기백 소령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렸다. 이 소령은 맥주 한 컵만 마셔도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를 정도로 술은 전혀 못하는 체질이었다. ‘조심해!’라는 소리와 함께 잽싸게 달려가 김복동 소령의 허리춤을 간신히 붙잡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를 도와 김복동 소령을 건져 올렸다. 이기백 소령의 동작이 1초만 늦었어도 김복동 소령은 ‘물고기밥’이 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날부터 이기백 소령은 김복동 소령을 살려낸 생명의 은인으로 통했다.

또 하나의 사건.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던 긴박한 순간에 김복동은 시내 모처에서 술을 마시다가 제시간에 청와대로 오지 못했다. 그러자 당시 백운택 준장 등이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직무태만으로 중징계할 것을 건의했으나 전두환 합수부장은 “원수도 품어야 할 때가 있다.”며 일단 구제하는 선에서 매듭을 지었다. 당시 김복동은 청와대 작전차장보였으니 제시간에 자리를 지켜야 마땅했다. 김복동은 10.26 직후 군사령부 참모장에서 육사교장을 거쳐 군복을 벗었다.

중정에서 안기부로 명칭 바꾼 초대부장

▲ 사진=ktv 화면 캡처

‘쎄울 꼬레아’ 1981년 9월30일이었다. 이 날은 우리 스포츠사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감격적인 날이었다.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IOC총회에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서투른 발음으로 1988년 하계 올림픽 계최지를 ‘쎄울’이라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2002년 월드컵대회에 앞서 우리 국민들에게 커다란 흥분을 안겨다 준 즐거운 대사건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치열한 경쟁 끝에 일본의 나고야를 따돌리고 세계 인류 최대의 제전인 올림픽을 서울로 유치했다는 점에서 국민의 자긍심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이러한 한국 스포츠외교의 획기적인 승리는 국력의 신장과 함께 스포츠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가져왔다. 특히 대한민국의 눈부신 발전상을 전 세계에 알린 88서울올림픽은 동구권에 충격을 주어 체제변화를 가져오는데 기여하는 등 그 역사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면에서 여건이 불리하기만 했던 한국이 경쟁국 일본을 제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국익이 걸린 중대한 ‘거사’ 뒤에는 반드시 치열한 로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로비의 실체는 대체로 공개하지 않는 것을 불문율로 삼고 있다. 88서울올림픽 유치공략도 예외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어떤 전략으로 로비를 펼쳤는지 등 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잘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몇몇 기업인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는 정도의 내용이 세간에 떠돌았을 뿐이다. 이처럼 베일에 가려졌던 88서울올림픽 유치는 기실 국가안전기획부가 극비리에 주도했던 것으로 유학성(兪學聖) 전 안기부장에 의해 처음 밝혀졌다. 생전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은 사실을 처음 털어놨다. 올림픽 유치작전은 유학성 당시 안기부장이 진두지휘했으며 ‘로비팀’은 모든 것이 성공리에 끝난 뒤 곧바로 해체했다고 말했다.

당시 극비리에 추진됐던 올림픽 유치작전은 어떻게 전개됐을까. 얘기는 그가 안기부장으로 발탁됐던 시점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그러니까 5.18민주항쟁 등으로 정국이 어수선했던 1980년 어느 날 3군사령관으로 재임 중이던 유 장군은 평소대로 아침 일찍 자신의 집무실로 출근, 하루 일과를 챙기고 있었다. 이 날따라 청와대와 직통으로 연결된 핫라인 전화벨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잔뜩 긴장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최광수(崔侊洙) 대통령비서실장의 목소리였다. 내용인 즉 급히 유 장군을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날 오후 둘은 약속장소인 서울시내 모호텔에서 만났다. 만나자마자 최 실장은 “중정부장을 맡아보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갑작스런 제의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유 장군은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요. 군인으로 몸담아 군사령관까지 한 것으로 족합니다. 게다가 정보책임자로서는 나에게 자격이 없습니다.”라며 거절했다.

그러나 며칠 뒤 유 장군은 또다시 청와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최 실장과 만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최 실장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그는 “유 장군님,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중정을 꼭 맡아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각하의 명령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고 하면서 전두환 장군의 추천도 있다고 귀띔했다. 더 이상 어쩔도리가 없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이라는 데야 어쩌겠는가.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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