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나딘 라바키 감독의 영화 ‘가버나움’이 지난주 개봉됐다. 코미디 ‘극한 직업’은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가버나움’은 비교적 조용한 가운데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영화가 드라마와 다른 차원에서 취급되는 이유 중 하나는 평생 영향을 받는 ‘작품’이 꼭 존재한다는 점인데 ‘가버나움’이 그렇다는 것.

혼돈의 레바논. 빈민가에서 부모와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함께 사는 12살인지 13살인지 나이도 모르는 소년 자인이 주인공이다. 유독 애정이 가는 여동생 사하르의 초경을 알아챈 부모가 집주인 아들 아사드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낸 데 반발해 가출한 뒤 에티오피아 출신 난민 미혼모 라힐을 알게 된다.

자신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이 소년은 라힐의 어린 아들 요나스를 돌보는 보모를 자청한다. 라힐이 경찰의 단속으로 구금되고 이 사실을 모르는 자인은 요나스를 데리고 거리를 헤매며 그녀를 찾고 구걸하다가 사하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그는 아사드에게 칼을 휘두른 뒤 경찰에 잡힌다.

법정에 선 자인은 사건 내용과 전혀 다른 읍소를 한다. 자신을 낳은 뒤 방치한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엄마가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준다”라며 사하르의 죽음 뒤 아이를 가졌다고 하자 자인은 “뱃속의 아이도 나처럼 되니 애를 그만 낳게 해주세요. 엄만 감정도 없나 봐요”라고 절규한다.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바레인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이슬람교를 비롯해 기독교, 힌두교 등 10여 개의 종교가 허용돼 다종교의 관용적인 국가인 듯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시리아 내전과 아랍연합에 맞선 이스라엘 사이에 끼어 ‘새우 등’이 터지고 있는 나라다. 시리아 난민과 테러 조직의 유입으로 민간인의 안전은 풍전등화다.

왜 하필 베들레헴-나사렛을 이은 예수의 고향 가버나움이 제목일까? 예수는 이곳에서 오병이어를 비롯해 죽은 여자를 살리는 등의 각종 기적을 행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고 타락하자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그대로 사라진 도시다. 감독은 바레인의 현 상황이 그와 다름없다고 본 듯하다.

버젓이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의 일상은 전쟁놀이다. 어른은 아이를 사고팔며 생계의 도구나 성적 노리개 정도로 여길 뿐 보호와 인권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이에겐 잔인한 세계다. 그런데 풍광만 다를 뿐 내용은 전혀 낯설지 않다. 어린 자식을 학대하고, 성폭행하며, 살해 후 유기하는 뉴스!

우리 윗세대 일부는 아직도 ‘제 먹을 건 다 타고 난다’라는 구시대적 팔자론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난산과 각종 질병, 그리고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채 피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아이가 많았기에 사회적으로 다산이 미덕인 시절이 있긴 했다. 다수가 가난했기에 인정이 생계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하지만 지금은 행복의 기준과 삶의 방법론이 확 바뀐 첨단의 시대다. 단순히 배만 부르면, 간신히 추위를 피할 만큼만 걸치면 자족하는 게 삶의 전부가 아니다. 생물의 종족보존은 본능이자 세상에 왔다 가는 이유다. 그런데 동물도 제 새끼의 자립 때까지 철저하게 보호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자인의 부모를 비롯한 다수의 어른은 생존의 본능보다는 인격이 배제된 동물적 성욕 탓에 임신하고 ‘어쩔 수 없이’ 출산한 뒤 방치하거나 학대하고, 그것도 모자라 내다 판다. 이 영화는 무지한 어른들의 무책임과 더불어 전쟁을 불사하는 욕심과 그런 용기를 제공하는 각자의 신에 대한 일원론을 꼬집는다.

동물은 딱 3가지 이유로 공격한다. 제 영역이 침범 당했을 때, 짝짓기 시즌 때, 그리고 배가 고플 때. 그래서 배가 부를 땐 먹이 거리가 나타나도 거들떠도 안 본다. 하지만 인간은 성욕 때문에 강간을 불사하고, 부자일수록 더욱더 벌겠다고 눈에 불을 켜며, 종교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다.

과연 그들의 신은 그렇게 학살을 자행해가면서까지 세상을 오직 그들만의 유일신의 세상으로 만들라고 가르쳤을까? 과연 신은 무슨 이유로 인간에게서 하나를 빼앗고 그 대신 다른 하나를 주는 것일까? 현대철학에 큰 가르침과 반박을 동시에 야기한 니체가 두드러지고 사르트르도 살짝 엿보인다.

▲ 영화 <가버나움> 스틸 이미지

바레인에서 가장 큰 종교는 이슬람교 시아파다. 하지만 감독은 대놓고 가버나움을 제목으로 정함으로써 이슬람에 반기를 들 뿐만 아니라 기독교마저도 웃어넘긴다. 신을 거부하고 특정 종교에 반발하는 게 아니라 신을 핑계 삼는 인간의 종교 문명의 기층에 깔린 ‘융즉의 법칙’을 강력하게 비난하는 것.

특정 종교의 가치전도를 또다시 가치전도하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하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살짝 차용해 현상일원론으로 맹신 혹은 광신의 허상을 조롱한다. 자인의 일탈과 인정투쟁(헤겔)은 ‘소박하지만 창조적인 힘’, 바로 ‘디오니소스적 긍정’(니체)인 것이다.

로우틴의 소년이 제 몸의 3배는 됨직한 어른에게 칼을 휘두르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부모를 고발하고 싶다고 울부짖는 현상은 지옥도를 연상케 하지만 그 내막을 열면 진범은 종교, 체제, 권력, 사회 등을 이끄는 어른들이라는 비극. 영화는 바레인의 고해성사가 아니라 지구 전체를 향한 고발극이다.

자인과 사하르는 출생신고가 안 됐기에, 라힐과 요나스는 불법 이민자이기에 그들 모두의 즉자는 존재하지만 없는 존재다. 그들이 생존의 몸부림을 치는 이유는 그 대자 존재들이 그나마 디오니소스적 긍정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이 아닐까? 대자는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인 의식이니까(사르트르).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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