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뺑반>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극장 상영용 장편영화는 사뭇 음식 같은 면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몇 번씩 보기도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재미있냐고 코웃음을 치는 사람도 있다. 현재 흥행 1위인 ‘극한 직업’이 재미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걸 유치하다고 외면하는 이도 분명히 있다. 취향과 인식의 차이다.

오는 30일 개봉될 영화 ‘뺑반’(한준희 감독)에 대한 각 매체의 양극의 반응이 그런 맥락이다. 영화 배급자나 평론가, 그리고 담당 기자는 평범한 대중에 비해 영화에 해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들도 모두 사람이다. 배급자는 흥행을, 기자는 보편타당한 관객을, 평론가는 명성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다.

‘뺑반’은 포스터에 ‘짜릿한 범죄 오락 액션이 온다’라는 카피를 삽입했다. 뺑소니사고전담반이라는 경찰의 특별한 부서를 전면에 내세워 도로 위의 ‘조폭’과 다름없는 폭주족을 잡는 스피드 액션을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실망의 리뷰를 낸 매체는 아마 ‘분노의 질주’의 카 체이싱을 기대했던 듯하다.

또 다른 포스터는 ‘끝까지 쫓아서 확실하게 잡는다’라는 카피와 더불어 역시 시연(공효진), 민재(류준열), 재철(조정석)을 전면에, 지현(염정아)과 선영(전혜진)을 약간 후면에 배치했다. 스피드 범죄 액션이라는 느낌은 여전하다. 재미를 위해 카 체이싱 액션을 배치한 건 맞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 이미지

‘분노의 질주’는 단순하게 화끈하다. 목숨을 걸고 찍었다는 느낌이 들 만큼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만든다. 여기에 미국 특유의 가족애를 드라마로 장치한다. 영리하게 계산된 할리우드의 흥행공식을 정밀하게 지키기 때문에 딴죽을 걸 소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뺑반’은 불만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 감독이 ‘차이나타운’으로 데뷔한 작가라는 걸 감안한다면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점과 즐기는 차원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147만여 명이 관람한 ‘차이나타운’의 주인공은 차이나타운의 뒷골목을 지배하는 보스 엄마와 그녀의 손에 자라 사채 빚을 받아내는 해결사로 일하는 고아 일영이다.

지역 경찰 수뇌부에게 뇌물을 먹인 뒤 쥐락펴락하며 폭력과 살인을 자행하는 엄마는 일영처럼 자라 자신의 ‘엄마’를 죽인 뒤 그 자리에 올랐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일영은 아무런 생각 없이 어려서부터 엄마의 지시를 관성적으로 따랐지만 자신을 닮은 청년 석현을 사랑하면서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일영의 변화를 눈치챈 엄마는 그녀와 석현을 죽이려 하고, 일영은 자신과 석현을 지키기 위해 엄마와 맞선다. ‘차이나타운’의 장점을 발견한 관객에겐 ‘차이나타운’과 달리 ‘뺑반’이 갈수록 여자들보다 민재와 재철의 심리적 갈등에 치중하는 게 불만일 수 있겠지만 두 작품이 적잖이 닮은 것은 맞다.

▲ 영화 <뺑반> 스틸 이미지

엄마는 재철과 경찰 간부로, 일영은 민재와 시연으로 각각 세포분열한다. 엄마는 마치 사자처럼 쓸모 없는 ‘자식’은 버리고 쓸모 있는 ‘자식’만 양육해 거느리고 있다. 뺑소니 사고 및 경찰 고위층의 비리에 깊게 연루된 기업 회장 재철을 잡으려는 경찰 내사과와 뺑반은 그의 임원 하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그 임원은 “우리 회장은 당신들이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자해를 한다. 차이나타운 내에서 신성불가침인 엄마처럼 재철은 신적인 존재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의 자살을 목도한 뒤 이탈리아 마피아와 어울리며 생존법을 배운 것도 엄마와 유사하다.

고아로 자란 민재는 마약을 팔고 폭주를 일삼는 ‘어둠의 자식’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잡으려던 경찰을 위기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그의 양아들로 입적된 뒤 새 사람으로 거듭났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찰이 됐다. 민재는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재철은 그런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들며 괴롭힌다.

일영이 마냥 투명하고 맑은 석현을 만남으로써 소여에서 사유로, 감성에서 이성으로 변전해가는 여정과 비슷하다. 거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시연은 일영의 본래적 존재다. 기재했던 순수한 영혼이 도래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가 아니라 혼재된 이원론을 펼친다는 영리함도 닮았다.

▲ 영화 <차이나타운> 스틸 이미지

정치인들은 세계 평화와 자국의 이익을 외치지만 다수의 서민들은 평화와 안정과는 심한 거리감을 느낀다. 아직도 많은 어린아이들이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는가 하면 적지 않은 나라가 내전과 정국의 불안정으로 불안에 떨고 있다. ‘뺑반’의 주인공들도 결코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사투 중인 듯하다.

재철과 경찰 수뇌부, 지현과 선영, 시연과 민재 등의 불편한 동거 혹은 이항대립 역시 이원론이다. 재철과 경찰 간부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지만 서로의 이해타산을 위해 불편한 동거 관계를 잇고 있다. 경찰 초기 유망주였던 선영은 영수증을 붙이고 있지만 그녀보다 못했던 지현은 승승장구 중이다.

엘리트적인 시연은 매뉴얼의 원칙을 앞세운 행태주의 태도를 취하지만 이론적 논리가 부족한 민재는 게슈탈트(형태주의)로 수사를 한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현실은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다. 다사다난한 세상과 복잡다단한 인간사에서의 모범답안은 수많은 이론과 주의만큼 상황과 사정에 따라 달라진다.

‘일부 주인공은 (비겁하게) 사는 게 (참되게) 사는 게 아니지만 한 숭고한 특별출연 인물은 (장렬하게) 죽지만 (존재 가치가) 죽는 게 아니다’라는 진화한 동일률의 법칙은 장엄하다! ‘차이나타운’의 음습하고 암울한 분위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각자의 삶의 과정과 그걸 조장하는 현실의 서늘함은 여전하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