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일본 작가 키시로 유키토의 만화 ‘총몽’을 실사화한 ‘알리타: 배틀 엔젤’(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첨단 기술의 발전이 어디까지 갈지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값어치는 충분하다. B급 정서 가득한 로드리게즈 감독은 과연 이 디스토피아적 철학의 세계를 어떻게 구현해냈을까?

300년 전 URM(화성연합공화국)의 총공세로 대추락이 발생, 마지막 공중도시 자렘과 황폐화된 지상의 고철도시만 남은 26세기의 지구. 무료로 사이보그를 치료해주는 의사 이도(크리스토프 왈츠)는 고철더미 속에서 쓸 만한 부품을 찾던 중 머리와 가슴만 남은 사이보그 소녀(로사 살라자르)를 발견한다.

피살된 장애인 딸이 살았을 때 그녀를 위해 만들었던 기계 육체를 소녀에게 이식해준 뒤 알리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딸처럼 돌봐준다. 자신이 언제, 어느 곳에서 살았는지, 이름이나 직업은 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알리타는 도시 생활에 적응해가던 중 인간 청년 휴고(키언 존슨)와 친구가 된다.

도시인들의 유일한 희망이 자렘에 올라가는 것이라면 단 하나의 오락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스포츠 모터볼이다. 최종 우승자에겐 자렘에 올라갈 기회가 오는 것. 자렘은 고철도시와 연결된 튜브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고 있는데 불법으로 튜브를 통해 자렘에 잠입하려던 도시인 상당수는 보호 링에 희생됐다.

▲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스틸 이미지

휴고는 자렘에 가려고 도시의 지배자 벡터(마허샬라 알리)에게 계속 돈을 바치고 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친구들과 얼굴을 가린 채 무차별로 사이보그를 기절시켜 그 부품을 분리해 판매하는 강절도를 일삼고 있다. 휴고를 통해 모터볼을 경험한 알리타는 자렘에 가기 위해 2부 리그에 참여한다.

이도와 그의 전처인 모터볼 기술자 시렌(제니퍼 코넬리)은 원래 자렘 출신이다. 무료 봉사하는 이도와 달리 시렌은 폭력과 독재로 도시를 지배하는 벡터의 밑에서 일하고 있다. 알리타의 정체를 알게 된 벡터는 자렘의 지배자 노바의 명령을 받들어 시렌과 함께 알리타를 잡기 위해 전 병력을 동원하는데.

영화는 원작의 철학을 비교적 잘 반영하면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의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 충실하다. 세계 최정상 시각특수효과(VFX) 스튜디오인 웨타 디지털의 혁신적인 기술로 탄생시킨 알리타를 비롯한 사이보그들의 활약은 현실과 환상, 실사와 게임의 경계를 넘어선 비주얼을 선사한다.

가장 큰 철학은 정체성. 자신의 본래적 존재는 물론 퇴락한 현존재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알리타를 통해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잇는다. 또한 고갱을 모델로 한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의 예술가적 세계와 칸트의 정언명령의 혼재를 선과 악의 대결로 도식화했다.

▲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스틸 이미지

노바, 벡터, 시렌 및 그들의 명령을 받는 헌터 워리어와 전투 사이보그들은 정과 사를 구분하는 게 아니라 그들만의 ‘세계’(팩토리)와 그게 만든 법률을 근거로 살아간다. 고철도시의 정체성과 그 지배 구조를 팩토리로 명명한 건 자본주의의 끝이 얼마나 암울한지를 보여주는 ‘매드 맥스’적 세계관이다.

자렘에서 고철도시를 내려다보는 노바는 사람인 동시에 신이다. 그래서 그는 의식이 육체를 이탈해 벡터 등의 몸에 들어가 인간과 사이보그 등에게 명령을 하달한다. 칸트의 물자체(현상의 기원, 선험적 대상)를 부정하고, 사물은 사람의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한 신칸트주의가 엿보인다.

그가 고철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벤담의 판옵티콘이고, 그런 그를 알리타가 아래에서 위로 노려보는 시퀀스는 시놉티콘이란 절묘한 뫼비우스의 띠. 노바 등이 주식 중개인에서 갑자기 예술가가 되는 ‘달과 6펜스’의 찰스라면 알리타, 이도, 휴고 등은 칸트다. 알리타는 더 나아가 파블로프의 행동주의다.

외부의 자극과 그를 통한 학습에 의한 조건화의 강화 과정을 거쳐 정체성을 찾아가는-과거의 기억을 되찾는-경험론을 구축한다. 그건 곧 욕구에의 자기의식에서 인정에의 자기의식으로의 전환인 헤겔의 인정투쟁이기도! “사이보그가 인간을 사랑할 수 있냐"와 “너처럼 인간다운 존재는 없다"라는 문답.

▲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 스틸 이미지

제작자 제임스 캐머런은 ‘A.I.’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간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알리타가 수시로 눈물을 흘리는 시퀀스로 명석판명한 답을 낸다. 그녀가 눈물을 자르는 건 인간으로서의 감정 조절 및 표현의 인식론이다. ‘장자’의 ‘호접몽론’이 던진 꿈과 현실의 구분에 대한 명징성의 선언이다.

도시가 약육강식의 질서(?)를 가진 건 자본주의가 인본주의나 인류애와는 애초부터 가는 길이 다르다는 해석이고, 그렇게 황폐화된 건 자업자득이란 뜻. 벡터의 “천국의 종이 되느니 지옥의 지배자가 되겠다"라는 사상은 교만의 타락 천사 루시퍼를 연상케 한다. 그에게 있어서 노바는 이미 신이므로.

정체성을 잇는 또 하나의 큰 주제는 카르마(업, 인과응보)다. 동서양의 철학을 교묘하게 잘 융합했다. 알리타가 URM 전통무술 기갑술의 고수고, URM의 생체 사이보그 육체로 갈아탄 뒤 매우 강력한 광전사로 거듭나는 시퀀스는 전형적인 중국 무협지 혹은 컴퓨터 게임의 구조이기에 큰 재미를 준다.

“불멸의 삶을 사는 건 계속 남의 죽음을 보는 것”이란 테제는 확연하게 ‘드라큘라’ 시리즈나 ‘A.I.’의 명제를 계승한다. ‘정신 따위는 육체의 장난감’이란 원작의 유물론적 게슈탈트는 다소 약해졌지만 소외와 분노에 대한 메시지만큼은 심오하다. 단 이도의 어설픈 액션은 옥에 티. 122분. 12살. 2월 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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