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말모이>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올 초 개봉돼 278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영화 ‘말모이’(엄유나 감독)에서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은 대사전을 만들기 위해 전국의 사투리를 모으고 거기서 표준어를 정한다. 표준어는 ‘한 나라의 규범으로 인정된 말, 법으로 정한 언어 규범’이다. 그렇게 우리 선조는 올바른 우리말 지키기에 힘썼다.

국립국어원은 2015년 6월 13일 ‘너무와 정말의 차이’를 묻는 한 국민의 질문에 너무를 부정 성격으로 규정했지만 15일 너무도 긍정에 사용이 가능하다고 변경해 공표한 뒤 18일 대답을 바꿨다. 오랫동안 자장면이 표준어였지만 짜장면의 혼용이 가능해진 사례와 유사하게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말모이’에 가공인물로 등장하지만 실제 우리말 지키기에 목숨을 걸었고, 오직 그 외길을 내달렸던 선조들의 지혜와 애국심을 거울삼아 국어에 대한 의식을 재정비할 필요가 절실한 때다. 다수가 포털사이트 및 SNS 등으로 소통하는 시대인지라 과하다 싶을 정도로 국어 파괴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업이라 해도 방송과 신문의 정체성은 언론이다. 명확한 팩트와 올바른 정보, 지식을 보도하는 게 의무라면 그 수단은 명징한 표준어와 바른말이다. 입춘을 맞은 2월 4일 아침 SBS TV를 1시간여 시청했더니 아나운서들이 ‘역대급’이란 말을 자주 썼다. ‘어르신’ ‘가족 분들’이란 표현도 나왔다.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을 위해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되는 신조어나 자극적인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건 그 정체성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쳐도, 보도, 다큐멘터리, 교양 등에서는 체통을 지키는 게 방송사로서의 본분이 아닐까? 역대는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여러 대, 혹은 그동안’이란 뜻이다.

급은 ‘계급, 등급’이다. 역대는 명사지만 ‘역대 최고 성적’ 등에서 보듯 관형적 의미의 보조 기능이고, 급도 명사지만 ‘일등급’처럼 앞의 관형적 뜻의 수식을 받거나 서술의 기능을 한다. 그 가운데 구체적 등급의 표현이 들어가야 존재할 수 있는 말이다. ‘어르신’과 ‘분’은 지나친 존칭 혹은 노예근성의 잔재다.

분은 사람을 높이거나 그 수를 셀 때 사용하는 의존명사다. 영업사원이 ‘단 한 분이라도 소중합니다’, ‘앞에 계신 분부터 차례로 입장하세요’라는 식으로 예우하는 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언론에서 ‘아무개 배우 분’이라고 말하는 건 국민을 깔보거나 평범한 접미사 정도로 착각하는 짓이다.

더 나아가 ‘어르신’이란 표현은 아예 전 국민을 ‘아랫것’이나 애로 보는 폭거다. 어르신(네)은 예전에 남의 아버지나 내 아버지 또래, 혹은 그보다 연장자를 가리킬 때 사용했던 호칭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미천한 신분이 양반 등 지체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썼다. 종이 주인을 부를 때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다수의 매체는 노인이면 어르신으로 부르고 쓴다. 시청자는 죄다 그 노인의 자식 아니면 천한 자란 말인가? 전통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반상의 구분, 신분제도의 잔재가 살아있는 단어를 아직까지 지상파 방송사에서 버젓이 쓰는 건 시청자를 우습게 여기거나 고려하지 않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렇다면 너무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변심’은 어느 정도 문제가 있다. 사전은 너무를 太의 ‘심하다, 정도가 지나치다’로 정의 내리고 있다. 당연히 부정적 정도부사다. 물론 워낙 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긍정과 부정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써왔기에 짜장면처럼 현실성을 포용하자는 의도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모든 신조어나 생활적 구어를 표준어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말의 정체성은 점점 희미해지는 게 않을까? 중국 문화가 잔존했던 시절엔 불란서가 통용됐지만 지금은 구시대적 표현이다. 같은 맥락으로 중국 국가주석을 시진핑이라고 하지 습근평이라고 하는 언론도, 일반인조차도 없다.

대중이 장궈룽을 아직도 장국영이라고 습관적으로 말하는 건 과거의 언론이 그렇게 주입했기 때문이지만 시진핑이 취임하던 2013년 모든 언론이 그렇게 표현했기에 대중은 시진핑이란 이름을 각인한 것이다. 범빙빙이 아니라 판빙빙이라 자연스레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적 흐름이란 그런 것이다.

만약 김두한이란 한국인이 있는데 일본에선 긴토칸이라 부르고, 중국에 가면 진더우한이라 호칭한다면 올바른 것일까? 뮤직비디오의 줄임말 ‘뮤비’는 20세기 말 스포츠신문이 유행시킨 신조어다. 제목에서 글자 수를 줄여야 하는 건 신문의 숙명이지만 영어식 M.V.를 외면하고 한국식을 택한 건 오류다.

적지 않은 함량 미달의 인터넷 매체에서 개념 없이 습관적으로 쓰니까 관성적으로 오류를 답습하는 착각에 빠지는 건 아닌지 방송하는 이, 글 쓰는 이, 그들의 데스크 등의 자성이 필요할 만큼 국어가 큰 병에 걸렸다. 어깨 근육이 발달한 걸 ‘어깨깡패’라 부르는 등 무감각을 넘어선 무지는 더욱 심각하다.

깡패란 폭력으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나쁜 사람이다. ‘올킬’의 ‘All kill’은 ‘모두 죽이다’다. ‘모두 사라지게 하다’라는 은유적 뜻도 있다. 다수의 매체는 ‘모든 경쟁자를 이기고 정상에 우뚝 서다’란 의미로 사용한다. 사회를 호전적으로 만든다. ‘오리지널 멤버가 모임’ 혹은 ‘완벽함’이란 뜻으로 완전체를 쓴다.

그 본래의 의미는 ‘하나로 완전한 상태를 이루는 무결점의 통일적 존재’다. 현실에 없는 이상형이다. 연예인이 신인가? 오리지널 멤버가 다 모이면 제우스-포세이돈-하데스의 조합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여신’ ‘연예인 분’ 등 일상화된 과한 존칭과 신격화가 일부 스타의 빗나간 우월감을 조장하는 건 아닐까?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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