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ktv 화면 캡처

미 CIA와 밀월관계 구축, 북방외교 시동걸어

유 부장은 재임시절을 떠올리며 필자와 인터뷰 당시 올림픽 유치비화를 처음으로 공개한 뒤 북방외교와 관련된 내용도 소개했다. 이는 그의 재임 중 2대 역점사업의 하나로 이른바 ‘5공식 북방외교’를 말한다. 즉 후일 장세동 안기부장의 북한방문 토대도 여기서 비롯됐으며 안기부와 미CIA의 밀월관계를 구축해 소련과의 관계개선에 물꼬를 트는 계기도 됐다.

그러니까 1981년 5월 유 부장은 미국 방문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방문은 당시 케이시 CIA국장의 초청을 받고 이루어졌는데 한국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CIA 책임자의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방문한 것은 중앙정보부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방문길에는 김근수(金瑾洙 중정공채1기) 정치정보국장, 김태서(金泰瑞) 북한국장, 이상열 해외정보국장 등이 수행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미국 방문길은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왜냐 하면 1970년대 후반 한미관계는 불편했던 일이 많았지요. 특히 박동선 사건에다 청와대 도청설 등으로 한국과 미국의 정보기관의 관계는 아주 형편없었습니다.”

그는 또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미 관계가 악화되면 우리 전체의 안보 외교가 어렵게 된다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면서 “정보기관 끼리 상호협력 관계는 한반도 안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술회했다.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띤 유 부장 일행이 CIA본부(버지니아주 랭글리)에 도착한 것은 그해 5월 어느 날이었다. 유 부장이 CIA건물 현관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진실을 안다면 그 진실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글귀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서울 남산 안기부 건물에 써 있는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부훈과 오버랩이 됐다. 뭔가 느낌이 달라보였다. 미리 마중나온 CIA 직원의 안내를 받아 CIA 케이시 국장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비록 일면식을 없으나 둘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케이시 국장은 수출입은행장을 거쳐 1980년 레이건의 선거운동본부장 및 정권인수반장을 맡아 ‘힘의 우위에 의한 소련 봉쇄정책’이라는 이른바 ‘레이건 독트린’을 성안했다. 이러한 레이건의 두터운 신임으로 케이시는 1981년 CIA국장에 임명되면서 카터 시절 일시 중단했던 ‘비밀공작’을 재개, 미 국방부와 국무부가 망설이는 국내외 분쟁지역에 대담하게 파고들어 ‘CIA비밀전쟁’을 활발히 벌이고 있었다. 유 부장은 이러한 성향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번 기회에 국익을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 사진=ktv 화면 캡처

생각보다 케이시는 우호적이었다. 유 부장은 먼저 막후공작 협력채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한국대사관의 안기부공사 손장래(孫章來)와 미국 부통령실 안보보좌관(당시 그레그)간의 막후 대화채널을 열어 남북고위급 회담은 물론 소련 및 중국과의 대화중개역할을 제의했던 것이다. 이에 케이시 국장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부시 부대통령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이에 따라 유 부장은 CIA국장 출신인 부시 부대통령을 만나게 된다.(제럴드 포드 대통령때 CIA국장을 지낸 조지.H.W 부시는 미 합중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유명하지만 부통령(1981년~1989년)을 지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즉, 전임자가 사망하지 않고 바로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대통령으로 이어진 사례는 20세기에서 유일한 인물이다.)

손장래-그래그 채널 본격 가동

CIA간부 출신으로 한국지부장을 역임한 그레그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때 김씨를 구출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비교적 한국에 우호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일은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특히 유 부장은 귀국길에 앞서 후한 대접까지 받았는데 워싱턴 매디슨호텔에서 베푼 만찬이 그것이었다. 여기에는 케이시 국장, 스타인 공작차장보, 그릴리 부국장, 그레이버 동북아국장 등 CIA를 움직이는 주요 간부는 모두 참석, 한국의 정보책임자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했다. 또한 김용식(金溶植) 주미대사가 마련한 만찬 때에는 버클리 차관 등 미국무부 한국관계자 대부분이 나와 양국간의 새출발을 축하하기도 했다. 이는 대외비로 열렸으며 이 때부터 코리아게이트로 인한 한미정보기관의 상호활동 제한이 풀리게 됐다.

이렇게 해서 손장래-그레그 채널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고 또한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노력도 꾸준히 펼쳐 나갈 수 있었으며 양국간 정보협력체제도 날로 강화됐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 주변의 인공위성을 통한 정보와 첩보가 한국측에 수시로 제공되었으며 특히 케이시 국장은 CIA외에 국가안보국, 국방정보국 등의 첩보기관과 상호교류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성공리에 미국 방문을 마친 유 부장은 귀국 후인 81년 10월 이러한 비밀채널을 이용한 역사적인 첫 사업으로 함병춘(83년 아웅산테러사건으로 순직) 주미대사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CIA-KGB-안기부 3각채널 007작전

▲ 사진=ktv 화면 캡처

1988년 7월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통해 6공화국의 주요 외교이념을 대내외에 천명한 바 있다. 이른바 ‘7.7선언’인데 이를 토대로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구권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의 방향설정을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헝가리(88년 2월1일), 폴란드(89년 11월1일), 유고(89년 12월27일), 체코(90년 3월22일), 불가리아(90년 3월23일) 등 동구권 거의 모든 국가들과의 수교관계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특히 소련(90년 9월30일), 중국(92년 8월24일) 등과 수교협정을 맺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결실은 한꺼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이와 관련 유 부장은 “우리의 북방외교는 5공초기부터 싹텄다.”고 말했다. 북방외교는 한국, 미국, 소련 등의 정보기관의 상호협조와 물밑대화를 통해 은밀히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 부장은 “당시 미국의 부시 부대통령은 이같은 우리의 제의를 받고 정보기관 채널을 통해 적극 도와주었다.”고 말했다. 유 부장은 81년 5월에 부시 부통령과 극비 독대를 했고 이 때의 밀약에 따라 그해 10월 함병춘 주미대사를 모스크바에 밀파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함 대사의 모스크바행은 미국의 중앙정보국,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그리고 한국의 안기부간의 3각채널을 통해 007영화처럼 스릴 넘치게 진행됐다는 것이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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