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2001년에 이어 오는 21일 재개봉되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어둠 속의 댄서’는 비극이라는 점에서 그리스적이고, 뮤지컬을 차용한 데서 할리우드적이며, 판타지를 장치함으로써 유럽의 정서를 담았다. 유니크한 로커 비요크(셀마 역)는 ‘신의 한 수’다.

1960년대 미국의 한 시골. 12살 아들 진과 함께 체코에서 온 이민자 셀마는 스테인리스 용기를 찍는 공장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한편 짬을 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연습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녀는 경찰 빌(데이빗 모스)과 린다 부부의 집 앞의 트레일러에 세 들어 살지만 밝다.

중년의 캐시(카트린느 드뇌브)가 친언니처럼 돌봐주고, 순진한 중년 제프(피터 스토메어)가 대놓고 구애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소처럼 일하는가 하면 형편상 사랑 따윈 사치라며 제프를 외면한다. 사실 그녀는 유전적으로 서서히 시력이 나빠져 곧 장님이 될 처지에 놓여있다.

그걸 잘 알기에 진만큼은 그렇게 만들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있는 것. 어느 날 밤 빌이 잠이 안 온다며 트레일러를 두들긴다.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풍요로울 줄 알았던 그는 그러나 린다의 낭비벽 때문에 빈털터리가 됐다며 운다. 셀마 역시 자신의 눈의 비밀과 아들 수술비를 말한다.

▲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스틸 이미지

앞이 안 보여 기계를 고장 낸 바람에 해고된 셀마는 조금 부족하지만 그동안 모은 돈을 의사에게 미리 내 수술 날짜를 잡으려고 집에 돌아와 저금통을 열었다가 텅 빈 것을 알고 빌의 집으로 간다. 빌은 1달만 빌리자고 하지만 셀마는 지금 당장 납부해야 한다고 맞서고, 낙담한 빌은 권총을 꺼내드는데.

검은 점에서 시작해 빨간색 등의 형이상학적인 형상으로 뒤엉켜진 뒤 하얀 바탕에 녹색 점으로 마무리되는 도입부의 그림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란 이 영화의 큰 주제를 시작부터 웅변한다. 빌의 높은 곳에 위치한 웅장한 2층 집과 아래 공간의 셀마의 초라한 트레일러 같은 식이다.

셀마는 존재하지도 않는 아버지의 이름이 올드리치 노비(Oldrich Nobe)라고 우긴다. 자본주의의 부에 대한 환상은 크지만 자신들에겐 비현실적이란 걸 알고 있다는 뜻일까? 진이 미국의 서부 개척의 상징인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아이러니. 셀마의 미국행의 목적은 오로지 진의 수술이었다.

빌은 이방인(사회주의자)을 대하는 미국, 미국의 공권력, 미국인 등을 상징한다. 인디언의 땅을 강점해 부를 쌓은 선조로부터 유산을 상속받고,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꾸려 겉으론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속을 곪을 대로 곪은 실상. 끔찍한 사건이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에서 벌어진다는 위선.

▲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스틸 이미지

셀마의 성격은 답답할 정도로 고지식하다. 자신을 배신한 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입을 다물면서 희생하며 죗값을 치를 줄 아는 양심은 과연 시대착오일까? 그런 이타적인 셀마에게 공장 동료가 “공산주의는 모두 나눠 갖냐”라며 비아냥거리는 게 과연 바람직하기나 한 걸까?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성조기의 시점에서 부감으로 잡은 셀마와 린다의 갈등 시퀀스는 표리부동한 미국의 민낯을 까발리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하다. 야근하는 셀마에게 관리자가 “속도가 빨라야 한다”라고 재촉하는 시퀀스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연상된다. 기계음에 맞춘 뮤지컬까지도.​

철학을 좋아하는 트리에는 셀마와 제프를 통해 경험론과 합리론의 한판 승부를 연출한다. “앞을 못 보네” “볼 게 뭐 있어? 모든 걸 다 봤는데. 더 이상 볼 것도 없어”, “나이아가라 못 봤잖아” “물을 봤으니 됐어”, “높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봐야지” “내 맥박이 더 높아. 이대로도 행복해”.​

미국 법정은 “이 나라가 베푼 온정과 친절에 대해 배신했다”라며 진실을 파헤치려 하기보다는 공산주의자에 대한 편견만으로 셀마를 몰아간다. 공산주의를 선호하면서도 뮤지컬은 미국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셀마의 의식은 정치가들의 이념투쟁에 희생된 민초들의 카오스와 절망을 의미한다.

▲ 영화 <어둠 속의 댄서> 스틸 이미지

셀마는 “내가 가고 난 뒤 누가 뭘 하든 상관없다"라는 단순한 이념일 뿐이다. “너처럼 될 줄 알면서 진은 왜 낳았어?”라는 제프의 비난에 대한 셀마의 “품에 안아보고 싶어서”라는 대답도 같은 맥락. 잉태(생각, 행위)는 출산(결과, 의미)을 수반한다. 단 책임은 당사자의 몫. 그래서 “모두 내 탓”이라고 한다.

셀마를 구해주려는 캐시는 “진에겐 엄마가 필요해”라고, 이에 반대하는 셀마가 “진은 눈이 필요해”라고 다투는 건 인식론의 전개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그녀는 마지막 노래가 나오기 전에 극장을 나온다. 그러면 영화는 계속되니까. 그래서 “최후의 노래로 만드는 건 우리에게 달렸다”라고 합리론을 펼친다.

줌인과 줌아웃이 혼재하고, 핸드헬드를 통해 한 커트 안에서의 프레임 이동이 잦다. 이런 아마추어적인 테크닉은 이념과, 사회적 통념과, 개개인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상충하는 시대적 혼란을 표현하고자 함일 것이다. 앞이 안 보여 철길을 따라 귀가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노출된 셀마는 바로 우리다.

셀마를 경찰에 고발하는 뮤지컬 감독이 새뮤얼(구약의 예언자)인 것 등 살짝 반기독교적인 냄새도 풍긴다. 뮤지컬엔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아 좋다는 셀마를 비극적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무참한 판타지! 결국 시력은 자본주의에 대한 순종 혹은 복종이란 불편한 뉘앙스만 빼면 대단한 걸작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