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박창희의 건강한 삶을위해] 두사불주형 필자가 술을 끊은 지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은 필자에게 주위에서 묻는다. 대체 언제까지 안 마실 셈이냐고. 인제 와서 뭘 먹겠느냐 초연하게 대답하면 그들은 계면쩍은 듯 입맛을 다신다. 같이 술 한잔할 생각에 저러나 싶어 십년 시점부터 다시 마실까요 하면 이내 얼굴이 밝아진다. 더 나아가 그날 술은 자신이 사겠노라며 예약과 동시에 확약을 받고자 한다.

정이 많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술 조차도 잔에 넘치도록 따른다. 하지만 그게 과연 정일까. 싸구려 소주를 쏟아붓듯 따라 주는 건 “이거 마시고 너 죽어”와 다름없다. 그걸 우리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옆으로 얼굴을 돌린 후 예의 바르게 마신다. 내 몸의 독이 될 뿐인 술을 왕의 친서인 양 감사히 받는 것이다. 자기 자식 안스럽게 여기는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한다면 그깟 술 인심을 쓰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이제 받았으니 상대에게 줄 차례다. 냅킨을 얼른 뽑아 잔 테두리를 뽀드득 소리가 나게 돌려 닦아 상대에게 내민다. 특히 여성에겐 그리해야 매너남 소리를 받는다. 핵 이빨 타이슨의 주먹으로 맞듯 간을 멍들게 하는 술로 가식적, 요식적 행위를 해가며 한바탕 질펀하게 거짓 쇼를 벌이는 게 술자리다. 입술을 축이듯 술을 마시며 분위기를 음미하는 술 문화는 먼 나라 일이다.

하루의 피로를 시원한 맥주 한, 두 잔으로 날리고 마무리하는 술자리는 요원한 희망에 불과하다. 날리긴커녕 피로를 새로 쌓고 전철 의자에 큰 대자로 누워 다음 날을 맞기도 한다. 목이 타 새벽에 눈을 떠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던 경험을 술 마시는 이들은 갖고 있다. 종착역 전철 속에 갇힌 신세처럼, 우리는 술 속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술을 일종의 해방구라 착각하는 우리는 술병을 들고 탁 트인 강변으로 나가기도 한다. 널찍한 한강 둔치의 술 파티는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마시고 얼른 귀가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안주를 실은 오토바이는 굉음을 내며 잔디밭을 내달린다. 이들이 뿌린 각종 안주 전단엔 GPS를 찍듯 현 위치를 알 수 있는 문구까지 인쇄되어 있다. 드넓은 잔디밭에 각종 음식물과 비닐봉지, 술병, 전단이 함께 뒹구는데 마치 폭격을 맞은 듯하다.

친절한 국가는 만국기처럼 잔디밭에 널린 전단을 보관하는 수거함까지 만들었다. 이 모든 행위를 인정하듯 말이다. 대한민국 공공의 술판은 만주벌 칭기스칸 말 달리듯 그 영역을 넓혀 가는데 그 확장의 욕심이 한도, 끝도 없다. 우리는 산, 들, 그리고 밭과 논과 강에서 마시고, 달리는 버스와 바다 위에서도 마신다. 흔들리는 관광버스, 선착장과 낚싯배, 심지어 여객선에서도 대형 술판, 춤판이 벌어진다.

음주로 얼룩진 동창회, 각종 모임, 등산로, 실내 골프장, 당구장, 심지어 야구장 한구석에 삼겹살을 구워 술을 마시는 존이 있다. 국내가 좁아 해외로 눈을 돌린 술의 민족은 동남아 여행 중 선상에서 회를 뜨고 술을 즐긴다. 늦은 시간 지하철 옆 사람에게 풍기는 술과 그의 안주 냄새를 맡는 일은 다반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허가받은 음식점 외 공공의 장소에서 술을 마시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자는 의견도 나오기 시작한다.

우리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술은 부모 앞에서 예의 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 알코올 중독자의 대부분이 부모 앞에서 술 배운 사람이라는 우스개도 있다. 그런 사회적 풍토와 인식이 금주 연령을 낮추거나 음용 습관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술은 어떻게 배우느냐보다 먹지 않거나, 줄이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때로 현실이 견디기 힘들어 술 먹는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나 임시방편에 불과할 뿐,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몸 망치고 경제적으로 피폐해질 뿐이다. 우리는 힘들어 술 먹은 게 아니라 술 먹어 힘들어진 것이다.

▲ 박창희 교수

[다이어트 명강사 박창희]
-한양대학교 체육학 학사 및 석사
-건강 및 다이어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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