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감독)는 일부 과거 회상 장면을 제외한 대부분을 모노톤으로 설정함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암울하고 음울한 시대상과 유관순 등 애국 열사들의 무참하고 비참한 수감생활을 전달하는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써 살짝 거친 연출 스타일을 매끄럽게 만드는 매직을 발휘한다.

17살 관순(고아성)은 1919년 종로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을 잇는 고향 충남 병천에서의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함께 참가한 부모를 일본군의 총에 잃은 그녀는 오빠 관옥과 함께 서대문감옥에 투옥된다. 관순이 수감된 8호실은 공간에 비해 인원이 넘쳐 다수가 서서 생활해야 할 정도.

그곳에서 관순은 고향 친구 만석의 엄마와 마주친다. 그녀는 관순 때문에 만석을 잃었다며 원망을 한다. 죄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관순을 동료 30명을 데리고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른 기생 향화(김새벽), 관순의 이화학당 선배 애라(김예은), 일어에 능한 다방 종업원 옥이(정하담) 등이 달래준다.

정춘영(류경수)은 완전한 일본의 신민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니시다로 개명한 뒤 일본 헌병에 지원해 서대문감옥 보안과 소속 헌병 보조원으로 근무 중이다. 잔인한 간수장의 명령으로 관순을 고문하는 데 앞장선다. 관순 등은 3·1만세운동 1주년을 앞두고 그날을 기념할 또 다른 만세운동을 계획하는데.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유관순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1948년, 59년, 74년 등 딱 3편밖에 없었다는 게 우선 놀랍다. 한국영화가 자체적 전성기이자 도약기이던 20세기 말~21세기 초에 유관순과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무관심했다는 게 경악스럽다. 드라마에 허구의 각시탈은 있었을망정 유관순과 안중근은 없었다.

영화는 뭣보다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유는 크게 2가지로 풀이된다. 아직도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며 존경심을 표하는 일제 망령에 취한 자들을 경고하고, 그러한 세력의 세뇌에 역사를 왜곡되게 배운 일부 젊은이들에게 경종을 울림으로써 21세기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쓰자는 의미일 것.

영화의 내용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담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커플을 이루고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이 혼돈의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이념과 가야 할 길은 어느 쪽일지 간절하게 호소한다.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까지가 우리이며, 뭘 해야 할지 웅변한다.

유관순은 감옥에서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성고문은 말할 것도 없다. 자궁 및 방광 파열로 숨졌다. 그런데 그 고문에 앞장선 이가 바로 니시다, 정춘영이다. 해방 후 반민특위가 구성돼 반민족 친일 매국노들을 단죄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역사는 왜곡된다.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정춘영도 잡혔다 풀려나 제 명대로 잘 먹고 잘살다 갔다. 반민족 범죄자들을 처단하지 못한 이유는 한반도에 반공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미국과 그에 빌붙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지키려는 이승만, 그리고 친일파 세력의 궁합이 맞았기 때문이다. 이걸 외면하는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일까?

감옥 안에 빼곡히 들어찬 애국자들은 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돈다. 이유는 가만히 서있으면 피가 쏠리고 근육이 마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도는 건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는 메타포가 아닐까? 그녀들은 스스로 “우린 개구리”라고 자조 혹은 비하한다.

개구리는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위협을 느끼면 울음을 뚝 그치기 때문. 그녀들은 벽을 따라 돌며 ‘아리랑’을 부르다가도 일본 간수의 호통이 터지면 입을 다문다. 하지만 개구리의 합창이 끈질기게 속개되듯 일제가 아무리 힘으로 짓눌러도 우리 민족은 결속력과 끈기를 보인다는 깊은 뜻이다.

간수장은 “조선이 망한 건 나태와 분열 때문”이라고 일본의 침략과 당시의 국제정세를 위장한다. 하지만 기분 나쁜 이 대사에서 왠지 언중유골이 느껴진다. 과연 당시 우리 왕실과 조정, 공무원과 국민은 나태하지도, 분열되지도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 테제의 답은 관순의 대화에 있다.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니시다의 잔인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 만세를 외치고 그들에게 항거하는 관순에게 한 조선인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요?”라고 묻는다. 관순의 답은 “그럼 누가 합니까?”. 이런 우문현답이 어디 있을까?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우리지 일본인이 아니다. ‘너’가 아니라 ‘나’다.

향화가 동지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노래를 부르자 만석 엄마는 “기생 출신이라 잘 논다”라 비아냥거린다. ‘네가 설치는 바람에 고향이 풍비박산 났다’며 관순의 숭고한 독립운동을 비난한다. 만석 엄마는 픽션이지만 당시의 이기적이고 나태하며 그래서 분열을 조장한 다수의 알레고리다.

유관순 열사의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은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는 유언이 새삼스레 상기되는 역사적 필독서다.

고아성은 이제 작품을 고르는 자기 정체성의 기준을 갖췄다. 연기력도 일취월장했다. 조금 낯선 김새벽, 정하담, 류경수 등은 성장을 기대해도 될 만큼 존재감을 드러낸다. 영화의 기능 중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땐 당연히 전면 배치해야 할 작품인데 12살 이상 관람 가라니! 105분. 2월 27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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