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함병춘 ‘철의 장막’ 모스크바에 극비 밀파되다

1981년 10월 중순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실. 유 부장은 아까부터 창밖을 바라보며 뭔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그의 표정은 이따금씩 한숨을 내쉬는 등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이 때 노크소리가 들렸고 유 부장은 낯익은 방문자를 맞이했다. 바로 주미대사를 지내다 연세대학교 교수로 복귀한 함병춘씨였다.

유 부장은 함씨와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나라를 위해 일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라며 모스크바행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함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소련은 우리와의 외교관계는 물론 다른 어떠한 대화채널도 없는 ‘철의 장막’으로 둘러쌓인 적성국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씨는 ‘국가의 중대사’라는 부연설명에 유 부장의 말을 차근차근 경청했다.

“어려운 부탁인 줄 압니다만 가실 분이 대사님밖에 없습니다. 한반도와 남북관계의 안정을 위해서는 소련과 중국의 도움 없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동안 우리 회사(안기부)는 미국의 중재 아래 소련과의 대화채널을 연결해 놓았습니다. 따라서 이제 모스크바에 다녀오는 일만 남았지요. 그 적임자가 바로 대사님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를 위해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수고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함병춘씨는 순간 이같은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신변안전 등 모든 일이 100% 완벽하게 끝나리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유 부장은 함씨의 걱정을 눈치챘는지 “신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미 그쪽과 약속이 다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암호명 ‘모 프로젝트’

다음 날 함병춘씨는 유 부장의 요청에 따라 안기부 해외담당부서장인 이상열 5국장으로부터 암호명 ‘모(모스크바의 머릿자) 프로젝트’에 관해 브리핑을 받았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한소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기 위한 1단계 공작으로 소련과 학술, 문화교류 방안을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이 국장의 브리핑 요지는 이러했다.

<접촉대상은 소련의 과학아카데미 동양학연구소 책임자와 외무부 동아시아책임자. 한국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워싱턴 채널을 통해 이미 모스크바에 전달되어 있슴. 이번 임무는 외무부는 물론 우리 정부내의 어떤 기관도 모를 만큼 고도의 보안 속에 진행중임. 다만 CIA와 KGB가 알고 있으며 KGB요원의 신변협조가 보이지 않게 이루어질 것임. 북한 친구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 요망.>

이렇게 해서 그의 모스크바 잠행은 극비리에 이루어지게 됐다. 그렇다면 왜 함병춘씨가 그 임무를 맡게 됐을까. 81년 5월 미국방문에서 돌아온 유 부장이 전 대통령에게 CIA국장 출신인 부시 부통령과의 면담결과를 상세히 보고하자 전 대통령은 보안유지에 각별히 유의해서 적극 추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따라서 유 부장은 미국측과의 사전 약속대로 워싱턴의 손장래 안기부공사에게 수시로 명령을 내렸다. 손 공사는 조지 워싱턴대학의 중국 소련문제 연구소의 개스턴 시거 교수(전 국무부차관보) 등을 만나 모스크바에 한국정부의 뜻을 전했고 이어 소련측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며 모스크바로 밀사파견을 요청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유 부장은 적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외교일선의 경험도 있어야 하고 소련측 상대가 연구소인 만큼 이론과 학식을 겸비한 인물을 찾았던 것이다.

이같은 기준을 토대로 ‘인물파일’을 뒤지던 중 한 사람의 이력이 눈에 들어왔다. 함태영(咸台永) 전 부통령의 막내 아들 함병춘씨였다. 하버드대학 법학출신으로 38세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탁되어 청와대 정치특보를 지냈고 41세에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유 부장의 눈에 적임자임을 직감했고 며칠 뒤 함씨에게 전화를 걸어 차 한잔 나누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주일 소련대사관 급행 비자발급

모스크바로 출발하기 전날 안기부 5국장실에서 마지막 브리핑을 받고 나서야 관계자로부터 일정이 적힌 메모지를 건네 받을 수 있었다.

<모스크바행 비자발급지와 출발지는 일본의 동경. 소련대사관으로부터 비자를 받고 아에로플로트 항공기 탑승. 체류기간은 일주일. 돌아오는 코스는 프랑스 파리-동경-서울. 모스크바 공항에는 김영진(金英鎭 당시 조지 워싱턴대학 중소문제연구소 교수)씨가 마중 나올 예정. 우선의 목표는 학술 문화 창구개설이며 경제교류 확대와 외교관계 수립의 전망도 타진해보기 바람. >

메모지에는 모스크바내 미국과 일본대사관의 전화번호도 적혀 있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할 경우 우방국 대사에게 신변보호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함병춘씨가 일본의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것은 그 해 10월27일. 현지 안기부요원과 함께 곧바로 소련대사관으로 갔다. 비자발급은 생각보다 빨랐는데 이미 KGB로부터 연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그는 안기부요원이 건네주는 비행기표를 소지하고 아에로플로트에 몸을 실었다. 바로 이 시각 남산의 유 부장은 안기부 동경거점장인 이상구(李常九 전 안기부2차장) 공사로부터 함씨가 무사히 출국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 부장은 다시 CIA 서울거점장인 로버트 케네디에게 전화를 걸어 함씨가 소련으로 향했음을 알렸고 워싱턴의 손장래 공사도 케이시 국장과 부시 부통령, 그리고 앨런 안보담당특보 등에게 신속히 연락을 취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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