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사바하>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사바하’(장재현 감독)의 흥행은 과연 내달 6일 ‘캡틴 마블’의 가세에도 계속될 것인가? ‘사바하’의 흥행 질주는 ‘극한 직업’의 독주를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다소 약세로 보였던 ‘증인’(이한 감독)이 ‘극한 직업’을 밀어내고 2위에 오를 수 있게끔 ‘보이지 않는 손’의 위력까지 발휘하는 중이다.

영화 흥행의 성공 혹은 실패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사바하’의 비결은 감독이 심어놓은 각종 종교적 의미와 철학적 성찰에 있을 것이다. 소여에 충격을 주는 반전과 복선, 사고의 공간을 뒤흔드는 복병 등으로 관람 후에도 의문과 사유의 여지를 준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인류는 신과 함께하는가?

영화는 기독교, 불교, 그리고 민간신앙 등을 조합한다. 또 선과 악, 신과 인간의 경계를 묻는다. 가장 중요한 건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왜 세상이 이토록 혼란스러운데 나타나 정리하고 조율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 금화와 ‘그것’의 쌍둥이 자매는 먼저 던진 화두의 ‘떡밥’이다.

금화는 태아 때 언니 ‘그것’이 자신의 다리를 물어뜯어 불구가 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이란 정황은 안 보인다. 사실이라면 금화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금화의 ‘그것’에 대한 혐오와 원망 탓에 발생한 피해 의식일 개연성이 더 높다.

▲ 영화 <사바하> 스틸 이미지

한 무속인과 나한은 먼발치에서도 ‘그것’이 사는 창고의 괴이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것’은 뱀과 새를 부린다. 민간신앙은 나름대로 종교적, 문화적 의의를 지니지만 사이비도 혼재한다. 무속인에게 신이 내린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신의 생각과 가르침이 모두 옳거나 선하지는 않을 것이다.

금화는 피해자, ‘그것’은 가해자인 듯 시작되지만 갈수록 혼란스럽다. 괴물 혹은 악신으로 설정됐던 ‘그것’의 정체는 큰 반전으로 재미와 종교적 깨달음을 던진다. 이 자매는 이항대립의 길항적 존재이자 변이와 재조합을 통한 인간관계 혹은 종교적 갈등의 합리적 그물망이나 구성틀로 설정된다.

가장 큰 기독교적 메시지는 희생이다. ‘콘스탄틴’의 콘스탄틴은 타락천사 루시퍼에게 지옥에 떨어진 자살한 한 영혼을 천국으로 옮겨준다면 자신의 지옥행을 그에게 맡기겠다고 약속한다. 어릴 때 자살을 시도했던 콘스탄틴의 지옥행은 예정된 것이었는데 이 희생을 보고 하느님은 그를 살린다.

외모가 흉측하거나, 차림새가 남루하거나, 지독하게 가난하기 때문에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건 죄가 아니다. 악취를 풍겨 불쾌감을 줄 땐 세금을 못내 수도가 끊겼고, 목욕탕에 갈 돈이 없다는 이유가 있다. 그들 중에는 이타적이고, 선하기로 치면 미륵에 가까운 사람도 있다.

▲ 영화 <사바하> 스틸 이미지

이해를 통해 초월적 지혜를 추구하는 영리함이라니! 사슴동산의 사천왕 탱화는 동방교주 제석의 이중적 도상이다. 불교는 세상에 악은 없다고 보고, 원래 악이었던 사천왕이 부처를 만나 악을 벌하는 신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제석은 부처의 가르침은 물론 자연법마저 위반한 신이 되려 한다.

즉 ‘그것’과 제석은 인간의 나약한 믿음과 어리석은 아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2개의 양극의 대척점이다.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라는 이 테제는 진실과 거짓, 그리고 선과 악의 분류에 대한 혜안을 논제로 삼는다. 금화(금수+보화)에 비쳐볼 때 해안 스님은 그런 의미의 작명일 듯하다.

주인공 박 목사는 자아성찰 같은 종교 내부적 반성으로 비친다. 사이비 종교를 색출하는 명목은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돈벌이다. 그랬던 그가 인류애와 정의를 앞세운 박애주의자로 바뀌는 건 각 종교적 입장을 뛰어넘는 인간 본연의 숭고함의 득도다. 도덕과 이성의 가치관을 갖춘 정체성!

가장 먼저 세상과 인간을 만든 건 그리스신화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처녀생식으로 아들 우라노스(하늘)를 낳고 이 모자가 결혼해 낳은 자식 중 티탄 신족의 막내 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가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이에 공헌한 티탄 형제 프로메테우스와 에피메테우스가 각각 인간과 동물을 만든다.

▲ 영화 <사바하> 스틸 이미지

기독교는 하느님이 6일에 걸쳐 천지창조를 하고, 다윈은 진화론으로 사람을 만든다. 다윈주의자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신자가 더 많고, 다윈보다 그리스-로마신화가 더 많이 읽히니 일단 정서적으론 진화론보다 창조론이 우세한 셈이다. 과학은 당연히 빅뱅이론과 진화론과 혈맹이지만.

박 목사는 이렇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신의 의인화와 신인동형설, 신학의 인간화와 자연의 수량화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한다. 이 우주를 만들고 지구에 인간 등을 살게 했으며 자연법으로 다스리던 신은 왜 인류의 교만과 타락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방치했는지, 직무유기를 따진다.

어쩌면 박 목사는 지금까지 지켜온 자신의 신앙에 대해 상징주의냐, 몽매주의냐의 심각한 고민에까지 이른 듯도 하다. 그건 종교인을 떠나 혼돈의 이 시대를 사는 대다수의 관계 사이의, 혹은 개개인 각자의 가치관의 충돌일 수도 있다. 한때 식욕억제제였던 엑스터시가 현재엔 마약인 것처럼.

기독교의 뱀은 악이지만 불교는 수호신이고 니체에겐 지혜다. 플라톤의 항구적이며 초월적인 이데아는 뭘까? 과연 인간은 신과 함께하고 있는 것일까, 그 존재나 권위를 무시한 채 따로 가는 것일까? 신은 인간 내면의 이성과 지혜에서 발원하는 것인가? 창발적이진 않아도 심오한 질문들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