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소련의 동북아문제 최고 권위자와 학술교류 협의

함씨가 15시간여의 비행 끝에 모스크바 세레미츠예보 공항에 도착하자 약속대로 김영진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김 교수는 함씨와 같은 경기고 출신으로 워싱턴에서 팬암항공기를 이용, 3시간 전에 이미 모스크바에 도착해 있었다. 김 교수의 모스크바행은 평소 소련문제 연구를 해왔다는 점에서 발탁됐다. 게다가 그는 함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 이튿날 둘은 예정된 계획에 따라 동양학연구소의 카피차(82년 외무차관을 역임)와 한국계인 게오르그 김 박사를 차례로 만났다. 당시 카피차는 동북아문제의 최고 권위자였고 김 박사는 소련내 한인으로서는 유일하게 크렘린궁의 정책자문역을 맡고 있었다. 그는 또 78년 동양학연구소 제1부소장을 지냈고 ‘노동적기’ 훈장을 받은 영향력 있는 인물로 5공초 한국정부와 첫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88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함씨는 이들과 만나 우선 ‘한소 학술회의 개최’에 어렵지 않게 합의했다. 유 부장이 정한 1단계 목표인 ‘학술교류’가 성사되는 순간이었다. 이뿐만 아니었다. 크렘린측은 우리나라의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블라디보스톡 소속 극동함대 및 상선 등의 선박수리 가능성 여부를 타진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왔다. 일은 생각보다 이외로 쉽게 풀렸다. 함씨는 소기의 성과를 완수했다고 생각하고 긴장을 풀 겸 모스크바 시내관광에 나섰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서울의 유 부장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신변보장 합의각서가 있었지만 만약에 북한대사관 요원에게 납치라도 당하면 어떡 하나 하는 불길한 생각으로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주미대사를 지낸 외교거물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노릴 만한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함씨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왜냐 하면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KGB요원과 모스크바 주재 CIA요원으로부터 먼발치에서 체크되었으며 북한대사관측은 이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리공항에서 작전 성공 연락

이렇게 함씨는 11월2일 임무를 마치고 파리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공항에는 안기부 요원이 마중나와 있었는데 비로소 ‘붉은 광장’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함씨는 우선 서울의 유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학술교류가 이루어지게 됐다.”며 크렘린에서의 내용을 정리해 전했다. 유 부장은 즉시 청와대에 이같은 결과를 보고했고 워싱턴 등지에도 연락해 ‘모 프로젝트’가 무사히 끝났음을 통보했다. 그제서야 유 부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부시 부통령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가 아니었으면 일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5공화국때의 북방외교는 결실을 보지 못했다. 당시 엄청난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북방외교의 발목을 붙잡았던 것이다. 만약 83년 9월 소련전투기가 KAL기를 격추하지 않았던들, 83년 10월 아웅산 사건이 터지지 않았던들 어쩌면 소련과 중국의 수교는 5공화국때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함병춘씨는 82년 장영자 사건 직후 청와대비서실장을 맡았다가 아웅산때 순직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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