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여자 연예인이라면 대놓고 섹슈얼리티(성욕, 성의 사회적 문화)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메릴린 먼로가 대표적이었고, 요즘 걸그룹이 미니스커트와 핫팬츠 일색인 게 그러하며, 여배우의 화보는 대부분 말초신경을 노린다. 어쩌면 ‘여배우’라는 글 자체에 섹슈얼리티의 모든 함의가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흥행 중인 영화 ‘증인’(이한 감독)과 ‘항거: 유관순 이야기’(조민호 감독)의 여주인공 김향기(19)와 고아성(27)은 예외다. 어릴 때부터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그녀들은 성인이 된 지금 ‘증인’과 ‘항거’에서 재미의 명증과 의미의 명징성으로 ‘여’를 뗀 ‘배우’의 면모를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김희선, 이나영, 김태희 등 시대적 미모의 대명사인 여배우가 있는가 하면 미모보다 연기력 등의 작품에 대한 열정을 전진 배치함으로 두드러지는 여배우도 있다면 두 사람은 당연히 후자다. 대다수의 배우들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외모를 주무기로 삼는다면 그녀들의 위닝샷은 작품 선별력이다.

김향기는 6살 때 영화 ‘마음이’로 데뷔했다. 사실상 유승호와 반려견이 주인공이고, 그녀는 조연이었지만 또 하나의 ‘국민 여동생’의 탄생을 선포하기에 충분한 존재감을 뽐냈다. ‘바가지 머리’를 트레이드마크로 활동하던 그녀는 지난해 ‘신과 함께’ 2부작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하지만 눈치 빠른 관객은 ‘영주’(차성덕 감독)에 주목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반항적인 남동생을 키우는 10대 소녀 가장 영주가 이 잔인하고 험악한 세상에서 이기심, 복수심 등과 어떻게 마주하는가의 심리적 묘사에서 탁월한 솜씨를 뽐낸 김향기에게서 ‘리틀 전도연’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증인’은 정우성에게도, 김향기에게도 잊지 못할 이력서가 될 것이다. 결점을 발견하기 힘든 외모에 곧은 시대정신까지 갖춘 정우성이지만 작품 선택과 연기력에 있어서만큼은 매번 아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작심하고 달려든 듯하다. 그리고 김향기가 화룡점정을 해줬다.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에 몸담았던 순호(정우성)는 지긋지긋한 가난과 결별하기 위해 로펌에 취업한 뒤 출세 가도에 막 진입해 한 살인 사건 용의자의 국선 변호를 맡는다.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잔인하게도 유일한 목격자인 자폐 소녀 지우(김향기)를 법정에 세우지만 결국 그녀에게 감화된다는 내용.

드라마 ‘굿닥터’에서 주원이 연기한 서번트증후군 의사를 연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주원이 잘 했다면 김향기는 아주 잘했다. 세계와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친절하거나 위협적이라는 걸 잘 아는 지우는 자기 내면하고만 소통하려는 폐쇄성에서 벗어나 마음을 여는 순호를 점차 받아들이게 된다.

▲ 영화 <증인> 스틸 이미지

​도대체 여고생 역을 맡아 이 정도 소화력과 표현력을 보일 국내 여배우가 몇이나 될까? 14살 때 ‘괴물’(봉준호 감독, 2006)의 현서 역을 맡아 미국의 지배가 창조한 괴물의 먹잇감이 됐지만 저보다 어린 소년 희생자를 더 챙겨주던 그 담대한 고아성은 이제 유관순 열사의 또 다른 초상화가 될 태세다.

‘항거’는 3·1만세운동의 물결에 따라 고향에서 태극기를 나눠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서대문감옥 8호실에 투옥된 17살 유관순의 옥중 투쟁기를 담았다. 고아성의 경력으로 볼 때 지금쯤 그 정도 연기력은 당연시될지도 모르지만 전도연의 27살 때 연기 솜씨와의 상대적 비교 결과는 짐작이 가능하다.

20~30대 걸그룹 출신 배우들의 연기와 비교하면 그 매무새 평가는 매우 쉬울 것이다. 뭣보다 돋보이는 건 작품을 맞이한 비장한 각오와 캐릭터와 만나는 숭고한 태도다. 거의 모노톤인 이 영화가 벽화와 천장화만큼은 르네상스 회화의 메타 보물이라는 시스티나 성당을 만난 듯 숙연하게 만드는 이유다.

돈, 시간, 이동 등을 투자하면서까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다양하다. 요즘 같은 시대엔 ‘극한 직업’처럼 하릴없이 웃다가 절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영화가 필요하겠지만 오래 기억되고, 대화의 소재로 삼으며, 사유의 지평을 넓힐 만큼 각별하고 감동적인 ‘작품’은 시대를 막론하고 절실한 친구이자 스승이다.

▲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 스틸 이미지

​‘항거’는 누구나 잘 안다고 했던 유관순 및 8호실 열사들의 비장미를 그린다. 막연히 생각했던 성 고문이 간접적이지만 현사실적으로 그려지고, 그게 친일 매국노에 의해 자행됐다는 역사를 준엄하게 외친다. 고아성은 열사를 결코 영웅적이거나 경건주의적으로 표현하려는 과잉 해석과 거리를 둔다.

조선인으로서의 유전적 격률에 따른 독립 의지를 기초로 부모와 애국자들의 선행에서 배워 쌓은 초월론적 지침을 좇아 태극기를 들었고, 감옥에서 만세를 불렀다. 고아성은 그런 일제에 대한 저항성과 고문에 대한 면역성으로 만세가 결코 국지적인 미기상이 아님을 만천하에 떨친 열사로 환생했다.

걸그룹이 무대 위에서 ‘유후~’ 하며 입술을 오므리고 남성의 대뇌 쾌락중추의 자극제 역할을 하는 게 일상이라면 배우에겐 다양한 변신의 자세가 발전적 표상이자 구상화다. 여기에 역사적, 사회적인 의식화까지 갖춘다면 찬탄할 일이다. 김향기와 고아성의 역할과 인식의 표면화에서 그게 느껴진다.

공교롭게도 김향기는 4년 전 KBS1 2부작 ‘눈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갔던 종분 역을 맡아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분노의 게이지를 끌어올린 바 있다. 어린앤 줄 알았던 김향기와 고아성은 이렇게 품격 있는 여배우로 전사되고, ‘증인’과 ‘항거’는 격조 높은 영화로 영사된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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