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이스케이프 룸>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밀폐된 공간 내 죽음 앞에서 탈출하는 공포 영화는 많았다. ‘이스케이프 룸’(애덤 로비텔 감독)은 유사한 길을 걷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나면 메이저스튜디오 소니가 왜 여기에 ‘방’을 내줬는지 충분히 수긍할 만큼 러닝 타임 내내 손에서 땀이 마를 줄 모른다. 사투의 인정투쟁으로 쟁취한 숭고미!

세계적인 방 탈출 게임 회사 미노스가 거액의 상금을 걸고 영민한 여대생 조이(테일러 러셀), 잘나가는 펀드 매니저 제이슨(제이 엘리스), 게임에 이골이 난 대니(닉 도다니), 전직 이라크전 파병 여군 아만다(데보라 앤 월), 마트 점원 벤(로건 밀러), 트럭 운전사 마이크(타일러 라빈)를 초대한다.

6명은 초대 주체도 모른 채 재미 혹은 상금을 목적으로 게임에 투입되는데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진짜 목숨을 건 생존투쟁임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들이 헤쳐 나가야 할 관문은 오븐 룸, 아이스 룸, 업사이드다운 룸, 포이즌 룸, 일루전 룸, 크러쉬 룸 등 모두 6개의 죽음의 방이다.

소사, 동사, 추락사, 질식사, 광사, 압사 등의 위협 앞에서 정해진 시간 내에 순간의 기지와 쌓아온 경험 등을 활용해 숨겨진 단서를 찾아 탈출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관념론과 경험론의 화해를 시도하는 의도가 빛난다. 역경을 헤쳐 나가는 가운데 왜 그들이 선택됐는지 비밀이 서서히 벗겨진다.

▲ 영화 <이스케이프 룸> 스틸 이미지

순진한 공붓벌레 흑인 소녀 조이는 엄마와 비행기 추락 사고를 겪었고, 흑인 청년 제이슨은 남모를 비밀이 있다. 아만다는 작전 중 화상을 입었고, 백인 청년 벤은 카운터조차 맡을 수 없을 만큼 사회적으로 소외됐다. 인도 소년 대니는 잘난 척 나대고, 중년 마이크는 광부 시절 매몰 경험이 있다.

나이도, 인종도, 직업도, 경력도 천차만별인 그들은 우연히 초대된 게 아니라 뭔가 계획된 음모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풍전등화 앞에서 이 게임의 진위 여부에 대해 골똘히 생각도 한다. 과연 룰은 뭐고, 의도는 어디에 있으며, 미노스는 진짜 그들의 목숨을 노리고 이 게임을 설계한 걸까?

미노스는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크레타의 왕으로 그리스 최고의 막강한 함대를 만들어 아테네를 정복한 뒤 매년 7명씩의 젊은 남녀를 제물로 받았다. 서자인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내준 흰 황소 덕에 왕이 됐는데 약속을 깨고 포세이돈에게 제물로 다른 황소를 바쳤다.

포세이돈의 저주로 왕비 파시파에가 흰 황소와 사랑에 빠져 반인반우 미노타우로스가 태어났다. 미노스는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명령해 미궁 라비린토스를 만들게 해 미노타우로스를 그곳에 가두었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라비린토스에서 미노타우로스의 먹이가 됐다.

▲ 영화 <이스케이프 룸> 스틸 이미지

게임 속 방들은 라비린토스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없다. 아테네의 젊은이들은 애국심의 발로에서 희생을 각오했지만 영화의 주인공들은 돈 혹은 취미와 재미로 게임에 참여했다. 결국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네를 구한 영웅은 왕자 테세우스다. 영화 속 테세우스는 의외의 인물이다.

각 방의 장치와 그것들 때문에 양심을 잃고 추악한 이기심을 표출하는 인간의 본능 자체가 미노타우로스는 아닐까? 흑인이 월스트리트의 에이스거나, 공부밖에 모르는 모범생이다. 백인 청년은 보잘것없는 ‘양아치’고, 중년은 하층 노동자며, 여자는 이라크전 파병 때 큰 트라우마를 안고 퇴역했다.

그리스신화와 더불어 차용한 장치는 인간의 심리다. 하이데거는 현실적인 현존재가 일상성에서 느끼는 대표적인 심리를 불안이라고 했다. 불안정한 생활 속의 불안한 심리가 낳는 건 결국 공포다. 제일 깔끔해 보이는 제이슨조차도 의뢰인들과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나름의 콤플렉스도 있다.

흑인이 똑똑하거나 상류층인데 백인은 가난하고 못 배웠으며 하층민이다. 인도 소년은 ‘게임 덕후’다. 즉 두뇌회전이 빠르다. 이 설정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깨달을 듯. “돈으로는 행복을 못 산다. 분수에 맞게 사는 게 낫다”라는 대사는 흔하지만 당연한 아포리즘이다.

▲ 영화 <이스케이프 룸> 스틸 이미지

죽음 앞에서 희생을 하거나 이기심의 극단을 보이는 상충 시퀀스는 심리학의 ‘죄수의 딜레마’다. ‘활성화된 두뇌 영역이 안정적으로 헵 법칙(정보의 인과 관계 학습법의 강화와 자동화)을 유지한다’는 양자 제노 효과를 거론하는 건 그걸 거듭 강조하기 위함이다. 비열한 잔존이냐, 장렬한 희생이냐?

‘세상만사에 우연은 없다’라는 은유적 주제를 위해 ‘오일러의 법칙’도 등장한다. 초반에 주인공들을 향해 미노스 안내 직원이 “헌신에 고맙다”라고 말하는 것부터 그 주제를 강조한다. 오븐 룸을 탈출하는 단서로 브래드 베리의 SF 소설 ‘화씨 451’을 능청스럽게 거론하는 것도 주제와 맞닿는다.

영화화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메마른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통해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사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비판한다. 긴박한 상황에서 크리스마스 캐럴 ‘루돌프 사슴 코’가 거론되는 건 아이러니컬한 세상만사에 대한 조롱이다. ‘문명이 생겨난 이래 사투는 좋은 구경거리’라는 인간의 야만성.

“경마 후 승리한 말이 상금 받는 것 봤냐”라는 대사는 마르크스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과연 미노스와 테세우스는 누구고,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무엇일까? 손에 땀이 아닌 피가 밸 것만 같은 스릴과 공포! ‘쏘우’보다 무섭고, 빠르며, 끝나도 끝난 게 아닌 플롯이 빛난다. 99분. 14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