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길티>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더 길티’(구스타브 몰러 감독)는 참으로 영악한 스릴러 영화다. 긴급 구조 센터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이뤄지는 간단한 구조 하나만으로 소리라는 소재를 통해 엄청난 긴장과 공포의 스릴을 조성하는 감독의 재능은 가히 천재적이다. 다수의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누구나의 상처를 보라!

형사 아스게르(야곱 세데르그렌)는 현장 근무 중 과잉 대응으로 재판 중이라 긴급 구조 센터로 좌천돼 112 업무를 맡고 있다. 술에 취한 사람, 약에 절어 횡설수설하는 사람, 심지어 그의 사건을 취재하려는 기자까지 잡다한 전화에 지치지만 내일 재판만 잘 끝내면 현장에 복귀한다는 희망이 있다.

그런데 퇴근 전 이상한 휴대전화 하나가 걸려온다. 전화기 너머 여자 이벤은 납치돼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인데 그녀의 집에는 어린 남매가 방치돼있다. 통화와 조사를 통해 그녀는 남편과 이혼했고, 집에는 7살 소녀 마틸데와 그녀의 남동생 올리베르가 함께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그녀는 전 남편 미카엘과 심하게 다툰 뒤 그에게 납치된 것이다. 즉시 이벤 집 근처의 구조 센터에 전화해 그녀의 집으로 순찰차를 출동시킬 것을 요청하고 이벤의 집 전화로 연결한다. 마틸데의 증언은 그의 예측을 적중시킨다. 마틸데는 아빠가 올리베르 방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 영화 <더 길티> 스틸 이미지

위급한 상황에서 이벤은 침착하게 미카엘에게 숨긴 채 마틸데와 통화하는 것처럼 대화하며 차량이 흰색 밴인 것까지 알려준 뒤 통화를 끝낸다. 그러나 순찰차는 고속도로에서 엉뚱한 흰색 밴을 수색하는 데 그친다. 다급해진 아스게르는 이벤의 휴대전화와 연결해 핸드브레이크를 당길 것을 제안한다.

한참 뒤, 다시 이벤의 휴대전화와 연결이 된다. 이벤은 미카엘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오히려 그녀는 밴 화물칸에 억류된 채 계속 이동 중이다. 미카엘이 벽돌공이라는 데 착안해 아스게르가 조언하자 이벤은 화물칸 안에서 벽돌을 발견해 손에 움켜쥔 채 미카엘이 정차한 후 문을 열 때를 기다리는데.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못생긴 아이가 낳자 홧김에 아래 세상으로 던졌다. 이를 발견한 바다의 딸 테티스의 보살핌으로 성장한 헤파이스토스는 대장장이 신이 돼 신들의 무기와 도구를 만들어줬다. 영화는 사회에 만연된 편견, 선입견, 섣부른 판단 등과 함께 소외된 심리적 불안함을 소재로 한다.​

심리학엔 ‘바라쿠다 신드롬’(창꼬치 증후군)이란 게 있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경험이나 관습에만 의존해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경험주의에 근거한 인식론은 과거에 연연하다 보니 새로운 가능성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써 발전이 정체되고, 도약이 가능하지 못하다.

▲ 영화 <더 길티> 스틸 이미지

영화는 드러내놓고 ‘클럽 바라쿠다’를 거론하며 교훈을 준다. 이벤이 아이들과 자주 놀러 가는 곳이 바로 수족관이다. 그녀가 아스게르에게 “한 번 오라”고 제안하는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은유다. 아스게르가 재판에 계류 중인 건 잘못을 저질렀거나 업무상 과실 혹은 고의로 불법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영화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기호학과 롤랑 바르트의 구조주의에 살짝 반기를 든다. 아스게르는 짧게 치켜 깎은 헤어스타일에 단단한 몸매로 마치 UFC 선수를 연상케 하는 외모를 지녔지만 내면은 매우 나약하다. 아내를 거론하는 파트너에게조차 이혼 사실을 밝히지 못할 정도로 소심하다.

불안정한 그는 자신의 직업도, 사생활도 모두 넌더리가 나고, 진저리가 친다. 그래서 “지긋지긋해서 뭔가 없애버리고 싶어서” 일탈 행위를 저질렀다. 모든 사람들에겐 정서적 불안과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기 마련이다. 이벤이 현상과 형상을 제대로 볼 수 없고 헷갈리거나 착각하는 것도 마찬가지.

오래된 관행과 케케묵은 경험에 근거한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가, 과거에 집착하는 관습이 새 시대의 진보적 흐름에 왜 걸림돌이 되는지 엄중하게 경고하는 영화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생기론과 기계론 사이에서 인격과 개성이 침해되는 인간들의 혼돈과 고뇌를 달래주는 안정제다.

▲ 영화 <더 길티> 스틸 이미지

“난 고의, 당신은 사고”라는 관념론은 그 결론이다. 인간의 행위는 의도에 따라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그 행위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타인의 인식 역시 엄청나게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다. 치열하게 살지만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 그런 타인에게 각 개인이 가질 의무와 사명은 관심과 약속이다.

아스게르가 엄마를 돌려보내 준다는 마틸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극렬하게 다투는 이유는 그런 차원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을 위한 치료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향한 죄악감과 자신을 향한 자책감을 보듬고 어루만지는 자가발전의 동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긴박한 생존의 투쟁인 것이다.

그 배경이 되는 건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있다”라는 대사다. 핏줄과 친구와 사회를 소유한 인간 개체는 헤파이스토스일지라도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생존의 이유고, 그 몸부림의 당위성이다. 마지막 아스게르가 퇴근하는 역광의 실루엣 시퀀스는 이 작은 영화가 가진 큰 의미다.

배경이 하얗고 인물은 검다. 얼룩말은 다수가 생각하는 흰색이 바탕이고 검은색이 무늬가 아니라 그 반대다. 여기서 감독은 중국의 ‘호접지몽’과 조우한다. 발상의 전환, 구습의 타파! 아이디어 하나가 적은 예산에, 작은 사이즈만으로도 엄청난 재미와 묵직한 메아리를 남긴다! 12살. 3월 27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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