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김윤석의 감독 데뷔작 ‘미성년’은 영어 제목이 ‘Another Child’다. 나이만 먹었지 정신연령은 청소년 수준에 머물고 있는 어른 셋, 그런 어른 밑에서 일찍 철이 들어버린 청소년 둘이 주인공이다. 평범한 듯하지만 혼란스러운 고밀도의 심리 상태에 빠져든 그들을 통해 현대인의 성장 과정을 보여준다.

여고 2학년 주리(김혜준)가 덕향식당 창밖에서 서성대며 내부를 훔쳐본다. 눈이 마주친 주인 미희(김소진)가 나오자 주리는 뒷걸음질 치다 넘어진다. 때마침 귀가한 같은 학교 동급생 윤아(박세진)가 의아한 모습으로 이 상황을 쳐다본다. 평소 친분이 없던 그녀들은 다음날 학교 옥상에서 만난다.

혼자된 지 오래된 미희는 주리의 아빠 대원(김윤석)과 불륜 관계이고, 배가 만삭이다. 주리는 어떻게든 미희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윤아는 엄마의 마음을 돌리는 걸 포기했다. 윤아는 주리의 휴대전화로 그녀의 엄마 영주(염정아)에게 이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영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주는 조심스레 덕향식당에 들어가 음식을 시킨다. 부른 배를 쥐고 행복한 듯 대원과 통화하는 미희의 모습을 보고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뒤따라 온 미희는 그녀의 정체를 눈치챘다며 들어가서 차 한잔하자고 권한다. 분노가 치민 영주가 그 손을 뿌리치고 쓰러진 미희는 하혈을 한다.

▲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는 조산임에도 생명을 건져 인큐베이터에서 보호를 받고, 미희의 생명에도 지장이 없다. 대원은 병원을 찾았다 주리가 부르자 황급히 도망간다. 집에도 들어갈 수 없는 그는 지인에게 의탁하려 충청도로 갔다가 그조차도 못 만나고 설상가상으로 노상강도를 당하는데.

미희는 대책 없는 철부지다. 윤아를 19살에 낳았다. 무책임한 아빠는 곧 둘을 떠났기에 윤아의 나이도 이름조차도 모른다. 갓난아이를 혼자 키운 ‘아이’는 외롭고 사랑에 목말랐다. 남자를 몇 번 만났지만 그렇고 그런 자들이었다. 대원은 다를 줄 알았다. 그래서 전화기에 ‘마지막 사랑’이라 입력했다.

대원은 이기적인 철부지다. 지적 소양을 갖출 만큼 배웠고, 중소기업 간부로서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나약하고 소극적이다. 별로 계획적이지도 못하다. 아래 직원이 회식 장소로 덕향식당을 지목하자 왠지 찔려서 정색하며 회사 근처로 하자고 허둥거린다.

영주는 꽤 침착한 듯하지만 그녀 역시 인간이다. 내면에서 요동치는 분노를 다스리려 성당을 찾아 고해성사까지 하지만 감정 제어에 실패한다. 주리보다 먼저 대원의 외도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리가 엄마를 걱정했던 것처럼 주리가 남편의 잘못을 알아챌까 우려해 표정 관리를 해왔을 따름이다.

▲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주리와 윤아는 각각 제 엄마를 닮았다. 주리는 모범생이다. 윤아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을 때 선생은 윤아가 잘못했으리라 확신했을 만큼 평소 품행이 반듯하고, 학습 태도가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결코 복종적인 ‘범생이’는 아니다. 사리분별력만큼은 분명해 선생에게도 할 말은 할 줄 알았다.

대원은 윤아로부터 ‘당신이 바람피우는 거 세상이 다 안다’라는 문자를 받은 다음날, 아침 먹고 가라는 영주와, 함께 등교하려는 주리를 피해 도망치듯 뛰쳐나간다. 주리는 할 말이 있어 잽싸게 그 뒤를 따르지만 놓친다. 뒤따라온 영주가 도시락을 건넨 뒤 집으로 들어가는데 맨발이다. 한겨울인데.

영주는 어떻게든 주리가 아빠의 어두운 면을 아는 걸 막고자 했다. “당신 각방 쓴 지 2년 됐잖아”라고 대원에게 암시를 줘도 이 답답한 남자가 알아듣지 못하자 ‘아내’는 포기한 채 ‘엄마’만은 지키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주리는 신산하게 되돌아가는 엄마의 맨발을 보고 버스 안에서 주먹밥을 욱여넣는다.

윤아는 엄마에게 적대적이고 세상에 부정적이다. 그녀는 무책임하고 편협하며 편견을 직관으로 삼는 어른들이 싫었다.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심야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미망적 엄마, 혹은 그녀가 번 돈을 못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하루빨리 자립하기 위해서였다.

▲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주리는 윤아에게 애원하지만 윤아는 무관심한 척한다. 엄마의 인식론은 에고에 갇혀있고, 관념론은 보상심리에 저당 잡혀있기 때문에 설득이 불가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부닥칠 때마다 주리와 윤아는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 거리를 둔다. 그런 그녀들을 잇는 건 인큐베이터의 ‘못난이’다.

17살에 만난 이복, 이부동생을 대하는 그녀들의 감정은 탄착점이 다르다. 아버지의 외도 전까지 별로 아쉬울 게 없었던 주리는 그저 새 생명이 신비로울 따름이고, 그 가여운 영혼에게 어떻게든 차선이나마 행복을 주고픈 인도주의적 생각이다. 그러나 또 다른 미희인 윤아는 엄마를 자청하고 나선다.

영주는 윤아에게 “흔들리면 안 돼”라고 충고하고, 이제 어른이 된 윤아는 “주리 걱정이나 하세요”라고 ‘친절한 금자 씨’처럼 말한다. 대원에게 영주는 “성욕이야, 사랑이야”라고, 미희는 “나, 사랑해?”라고 각각 묻지만 답은 없다. 인생사는 결정론(인과관계는 미리 정해짐)일까, 불가지론(알 수 없음)일까?

주리가 제일 좋아하는 뉴 밸런스는 새 세대가 이룰 신 균형을 말한다. 윤아가 30대 중반 엄마의 새치를 거론하며 “이제 늙었다"라고 말하는 건 그 추임새. 비극이지만 코미디와 희망가가 공존한다. 네 여배우의 열연이 새 유럽식 작가의 탄생을 도와 대단한 여성 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4월 11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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