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미성년’(김윤석 감독)과 ‘악질경찰’(이정범 감독)은 과연 성인과 미성년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뭣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법은 매년 1월 1일부터 한국 나이로 20살에게 술과 담배를 허용하니 사회적 분위기로는 그때부터 성인이다. 하지만 두 영화는 그런 단순한 숫자를 떠나 인식론적으로 깊다.

‘미성년’. 50살 안팎의 중산층 유부남 대원은 36살 미혼모 미희와 바람이 났다. 그들에겐 각 각 같은 여고 2년 외동딸 주리와 윤아가 있다. 미희가 만삭인지라 윤아는 진작부터 둘의 관계를 알았고, 주리도 최근 눈으로 확인했다. 주리는 천주교도인 엄마 영주가 알기 전에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그러나 영주도 이미 알고 있었다. 미희의 식당을 찾아간다. 미희도 여자 특유의 감으로 그녀를 알아챈다. 미희는 차 한잔하자고 하지만 영주는 손을 뿌리친다. 미희가 쓰러지고 태아는 예정보다 일찍 세상에 나온다. 그렇게 병원에 모인 네 여자는 어색하지만 산모와 신생아의 건강에 뜻을 함께한다.

가장이란 위치로 봤을 때 이 사건의 책임은 미희보다 대원에게 더 크게 있다. 뒤늦게 병원에 나타난 대원은 그러나 자신을 부르는 주리의 목소리를 듣고는 외면하고 도망친다. ‘미성년’은 아직 미성년자인 주리와 윤아의 성숙과 이미 어른이지만 미숙한 세 어른의 정신적 어수룩함을 말하는 중의적 표제다.

▲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미희는 18살 때 또래 남자와의 불장난으로 임신한 뒤 대책 없이 윤아를 출산했고, 일찍 모녀 곁을 떠난 윤아 아빠는 현재 정선 카지노 주변을 방황하며 딸에게마저 사기를 치려 한다. 윤아는 엄마가 안쓰럽지만 아빠 이후 매번 시원찮은 남자만 만나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울화가 치민다.

어린 나이에 자신을 낳은 것도 못마땅한데 한술 더 떠 뒤늦게 유부남의 아이를 낳으려 하다니. 윤아에게 엄마는 호칭만 엄마지, 자신이 떠맡아야 하는 짐과 같다. 영주는 비교적 평정심을 지키고, 현명하게 대처하려는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감정의 동물이란 태생적 한계를 깨고 신처럼 행동하긴 힘들다.

그녀가 정성 들여 끓인 죽을 싸 들고 병실을 찾아 미희에게 권하는 심리 상태는 뭘까? 같은 여자로서의 동병상련? 남편에 대한 미련에서 우러난 가정 보호 장치? 아니다. 최소한 주리를 지키려는 모성애 하나만큼은 확실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자기방어기제다. 천박한 그들과 다르다는 자기 과시의 가면이다.

미희는 많이 배우지 못했다. 지성과 교양도 다소 부족하다.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 고학력을 갖췄고, 신앙심도 두터운 영주는 그녀와 다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유부남과 바람이나 피우는 천박한 너 따위와는 수준이 다르다’는 강한 자긍심으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중이기에 그랬던 것이다.

▲ 영화 <미성년> 스틸 이미지

대원은 가장 비겁하고, 덜 성숙했다. 미희를 사랑했을 수는 있다. 지적인 ‘척’하는 영주에 질렸고, 가장으로서의 지난했던 지난 여정에 지쳤을 것이다. 돌발적인 성의 일탈 심리에 이성을 제압당했고, 영주와 전혀 달리 계산이 없는 미희의 질풍노도에 마음속 묻어뒀던 사랑의 불씨가 되살아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건 20~30대 얘기다. 불혹, 혹은 지천명의 나이니 주리의 대학 학비 걱정만 덜었다면 이제 개인사를 떠나 대의명분을 찾아 시야를 넓히고 나이에 맞는 걸 준비했어야 어른다웠다. 물론 그가 총각이거나 영주와의 사이가 아주 나빴다면 변명의 여지는 있겠지만 원인은 오직 그의 철없음에 있었다.

미희에겐 동정의 여지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보편타당한, 그리고 아름다운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기에 감정이 앞섰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성욕에 육체는 물론 순진한 정서까지 갈기갈기 찢겨온 그녀로서는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행복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에 비해 주리와 윤아는 어른스러웠고, 그 사건을 계기로 급성장한다. 현실주의인 주리는 신생아가 미희의 품에서 행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입양을 거론한다. 윤아는 그녀보다 더 나아간다. 아예 미희에게서 불행하게 자라느니 자신이 키우는 게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리란 확신을 보인다.

▲ 영화 <악질경찰> 스틸 이미지

‘악질경찰’의 여고생 미나는 어른들이 말하는 불량 청소년이다. 절도와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지만 사실은 그녀의 궁핍한 환경과, 이기적인 주변 어른들, 그리고 정의가 실종된 이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녀가 던지는 “이런 것도 어른이라고”라는 한 마디는 두 영화를 관통하는 통렬한 테제다.

‘어린 게 뭘 알아?’ ‘나이 들어봐, 그러면 알게 될 테니’ ‘너 몇 살이야?’ 등의 나이로 서열을 가리는 일방적이고 억압적이며 편파적인 위압이 꽤 오랜 세월 우리 정서를 지배했고, 아직도 위계질서의 보이지 않는 기준이 되고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100세 시대를 주장하는 세대가 특히 그렇다.

‘미성년’과 ‘악질경찰’의 감독은 50대 초반과 40대 후반이다. 그들은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는 노인 따위나 흉보자고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건 적건, 지위와 부에서 앞서건 뒤서건 나잇값을 못하는 어른, 연하자의 의견과 인격을 존중할 줄 모르는 못난 연장자를 겨냥한다.

어른을 공경하는 문화는 아름답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자식을 위해 희생한 부모에 대한 찬사와 감사도 훌륭하다. 하지만 지금 40대 이상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다. 생존한 노인들은 정치적으로 불행한 시대에서 왜곡된 역사를 배웠고, 독재 미화의 프로파간다에 속아 살았다. 나이보단 지혜와 교양이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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