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 전두환과 노태우, 권력으로 갈라서다 [김문 작가 칼럼]

김문 작가l승인2019.04.10l수정2019.04.1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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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파인=김문 작가가 쓰는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군장성들의 이야기]

▲ 사진=YTN 화면 캡처

절친 전두환과 노태우, 권력으로 갈라서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죽음을 향한 열차를 탄다. 그 열차의 종착점은 한 번도 변하지 않는다. 설사 종착에 대한 운명을 피하려고 중간중간에 내려본들 아무 소용도 없다. 인간이 운명의 열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날 종착점이 가까워졌을 때 뒤돌아보며 여러 행복했던 일, 그렇지 않았던 일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때 ‘피식’ 하면서 웃을 수 있는 일을 떠올릴 수도 있다. 바로 ‘벗’이다. 반갑고 정겨운 벗이 그 열차에서 한 잔 술을 기울이며 같이 여행한다는 것, 생각만 해도 행복하고 즐거운 복(福)일 것이다. ‘막역지교’(莫逆之交)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 거스름이 없이 만난 사람,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를 말한다. 누구나 한번쯤 젊은 시절에 “우리 영원히 변치 말자”, “죽을 때까지 함께 가자.”고 하면서 오고가는 술잔 속에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일이 있었을 것이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이를 놓고 막역지교와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군 출신 중에 이들 관계를 가장 잘 아는 고명승(高明昇 육사15기) 장군은 두 사람을 상관으로 모시면서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됐다. 3군사령관까지 지낸 고 장군에 의하면 두 사람의 성격은 중학교때부터 이미 대조적이었다. 그것은 장차 군에서의 활약과 위상, 그리고 행동 스타일 등을 비교분석하는 데에도 연결된다.

둘 다 가정형편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두환 소년은 끼니를 굶는 친구가 있으면 집으로 데리고 와 먹이곤 했다. 학교에 가지고 간 도시락도 자신보다 어려운 친구에게 몰래 주는 등 늘 주변의 학우들에게 신경을 썼다. 반면 노태우 소년은 언행이 신중한 얌전한 학생이었다. 당시 교모와 교복을 일부러 찢어 누벼입는 것이 유행이었으나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6.25전쟁이 나자 전두환 학생은 당초 학도병으로 입대하려고 했지만 이미 형 전기환(全基煥)이 입대를 한 상태여서 집안에서 극구 반대했다. 결국 방향을 바꿔 육군종합학교 간부후보생 모집에 응하여 합격했으나 이마저도 어머니의 결사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 전두환 학생은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4년제 육사생도를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는 육사에 응시, 1951년 9월 정규 육사1기로 입교했다. 만약 어머니가 반대하지 않고 보병 간부후보생이 되었다면 그의 운명은 6.25때 총알받이 소대장이 되어 전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시기에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자원입대한 노태우 학생은 친구들과 함께 대구에 있는 헌병학교에 입교하여 동기생 60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고 헌병으로 복무하다 전두환 학생과 나란히 육사에 입교했다. 이때부터 둘은 연고지가 같은 대구인데다가 대구공업중학교(나중에 노태우는 경북고로 편입)에 함께 다녔다는 인연으로 친형제처럼 지냈다.

생도시절 전두환은 축구부, 노태우는 럭비부로 활동

생도시절 전두환은 축구부로 노태우는 럭비부에서 특활활동을 했는데 그때 노태우 별명은 ‘아카징키’(빨간 소독약의 일본식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노태우가 럭비선수 활동 초기에 자주 다쳤는데 그때마다 상처난 부위에 ‘아카징키’를 바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학생 때부터 아버지의 유품인 퉁소를 잘 부는 등 음악적 소질이 있어서 문화적 취향이 비슷한 김복동과도 가까이 지냈다. 하루는 여름방학때 김복동의 집에 놀러가게 되었는데 그 당시 경복여고 1학년이었던 김복동의 여동생을 보게 됐다. 이 인연으로 나중에 결혼까지 했는데 바로 노태우의 아내인 김옥숙 여사이다.

노태우가 전두환을 ‘형님’으로 깎듯이 모시게 된 것은 1963년 5.16 주역들이 주도권 싸움을 할 때였다. 노태우가 ‘JP의 퇴진과 관련자 문책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게 되자 그를 살려준 것이 박 의장 민정비서관이었던 전두환 소령이었다. 이때부터 노태우는 전두환의 2인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형님으로 깎듯이 모시게 된다. 이후 둘간의 인연은 쭉 이어지게 됐고 성격이 활달하고 보스기질의 전두환은 군에서 요직을 거치면서 노태우에게 인계를 한다. 말 그대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고 장군은 “전 전 대통령은 군시절 동료들이나 후배들에게 철저하게 신의를 지키며 자신보다 남을 위한 일에 더욱 열성이었다.”고 회고한다. 노 전 대통령과의 관계도 그런 맥락에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각별히 대해줬음은 물론이다. 노 전 대통령은 육참총장 수석부관부터 시작해 공수여단장,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일선 사단장, 보안사령관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전 전 대통령과 거의 같은 코스를 밟았다. 그런데에는 전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었다고 고 장군은 술회한다.

리더십이 강한 전두환, 그늘에 가려진 노태우

그러다보니 노 전 대통령은 자연히 그의 그늘에 가려져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노 전 대통령이 전 전 대통령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은 비로소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부터였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하나의 껄끄러운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 로 전 전 대통령이 퇴임후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원로자문회라는 ‘족쇄’였다. 일종의 섭정 가능한 기구였으므로 노 대통령으로서는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문제의 쇠사슬을 끊버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국 전 전 대통령의 친동생 전경환씨의 구속(1988년 4월)으로 ‘노심'이 표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고 여론에 밀린 전 전 대통령은 국가원로회의 의장직을 내놓게 됐다.

이에 앞서 전두환 대통령은 임기가 끝날 무렵인 1987년 6월2일 후계자를 누구로 정할까 고심하던 중 청와대에서 열린 민정당 간부초청 만찬장에서 노태우를 공식 추천하였고 이어 6월10일 올림픽 공원에서 열린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게 된다. 노태우가 당선된 직후 12월20일 육사11기 부부동반 동창모임에서 이순자 여사가 김옥숙 여사한테 “직접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은 체육관 대통령과는 달라요.”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하는데 차 안에서 전두환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심정을 고백한 것으로 전해진다.

▲ 사진=YTN 화면 캡처

전두환 국회증언대, 6공시대 시작

1989년 12월 당시 정국은 5공청산문제로 하루하루가 숨가쁘게 돌아갔다. 백담사로 간 전 전 대통령이 국회에 출석해야 한다는 빗발치는 여론의 화살 속에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태였고 국면타개를 위해 노 대통령은 백담사로 직접 세 차례의 전화를 걸어 채찍과 당근의 방법으로 형님으로 모셨던 전 전 대통령에게 국회출석을 설득하고 있었다. 성탄절날 이루어진 전-노간의 통화내용은 이러했다. 막역지교의 사이가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노-국민의 여망은 여야 합의에 의한 5공청산의 연내 매듭이다. 원만한 증언만 아루어진다면 과거문제의 완전매듭을 기할 수 있다고 본다.

전-나도 현안의 조속한 매듭을 소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해결을 위한 확실한 보장이 없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내 증언만으로 5공문제가 완전히 마무리된다고 보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나를 증언대에 세우는 것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지만 결국 증언후 모든 책임은 내게로 돌아오는 것 아닌가. 여야 11개 합의사항에는 이런 내용이 없어 유감이다.

노-11개 합의내용의 기저에는 야당의 협조정신이 담겨져 있다고 본다. 아쉬운 부분도 있겠지만 산적한 국정을 감안할 때 더 이상 늦추거나 일방종결을 할 수가 없다.

전-내가 이번에 증언하면 마지막이어야 한다. 전직 국가원수로서 밝혀선 안될 부분까지 증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노-이번 합의는 국민적 여망에 부응하면서 시대적 상황에 대처해 나가기 위한 의지의 일환으로 이해해주기 바란다.

전-아무래도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 같다.

노-아무튼 알게 모르게 쌓인 그동안의 응어리를 풀어야 할텐데...

이 날 통화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마지막 설득을 위한 작업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이미 국회출석을 염두에 두고 12월26일 측근들을 불러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고 12월31일 국회에 출석해 증언대에 서게 된다.

이후 둘은 만나지 못하다가 1997년 내란죄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다시 만났다. 이때 둘이 손잡고 법정에 섰다. 이 광경에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고정시켰다.

▲ 김문 작가

[김문 작가]
전 서울신문  문화부장, 편집국 부국장
현) 제주일보 논설위원

김문 작가  gamsam10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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