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지구', 디스토피아에서 발견한 희망의 재난 SF [유진모 칼럼]

유진모 칼럼니스트l승인2019.04.12l수정2019.04.19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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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랑지구>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류츠신의 동명 SF 소설을 궈판 감독이 스크린에 옮긴 ‘유랑지구’는 ‘로스트 인 스페이스’, ‘인터스텔라’ 등 우주를 배경으로 한 꽤 많은 수작들이 연상되면서도 스케일을 확장한 중국의 배포가 두드러지는 재난 영화다. 중국 특유의 과장만 감안하면 꽤 재미있고 탄탄한 비주얼과 서사를 보장받는다.

태양이 노화로 인해 팽창함에 따라 지구 기온은 영하 70도로 낮아지고 300년 후엔 태양계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미래. 전 세계는 연합정부를 구성한 뒤 지하 5km 밑에 도시를 건설해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1만 군데에 엔진을 설치, 지구를 태양계에서 4.2광년 떨어진 곳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한다.

중국. 우주 비행사 류페이장(우징)은 장인 한즈앙(우멍다), 외아들 치(취추샤오)를 지하 도시로 보낸 뒤 지구가 안착할 곳을 찾는 탐사대에 합류한다. 그들이 지하행 티켓을 쥘 수 있었던 건 페이장이 중병에 걸린 아내를 포기했기 때문. 17년 후. 페이장은 후임과 임무 교대를 하고 지구로 귀환 중이다.

그동안 즈앙은 재난 현장에서 갓난아이 둬둬(자호진메이)를 구하고 입양해 치와 친남매처럼 키웠다. 정비공이 된 치는 중학생 둬둬를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작업팀에 끼어든다. 그러나 곧 연합군에 발각돼 구금된다. 지구는 목성에 가까워지자 그 중력에 이끌려 37시간 후 충돌할 위기에 처한다.

▲ 영화 <유랑지구> 스틸 이미지

중력에 의해 절반에 가까운 엔진이 손상되자 정부는 복구를 위해 구조대를 꾸린다. 치와 둬둬는 물론 즈앙까지 나서 왕레이 대위가 이끄는 구조팀에 합류한 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 설치된 엔진을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런데 우주정거장에 도착한 페이장은 정부의 속셈을 알고 경악하는데.

배우만 다를 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중에서 본 듯한 플롯인 건 맞다. 끈끈한 가족애와 개인보다 인류를 생각하는 인도주의적인 장대한 스케일도 그렇다. 그런데 지구를 다른 공간으로 옮긴다는 창의력 하나만으로도 이미 기존의 SF 영화와 차별화된 차원을 자랑한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도 좋다.

할리우드의 거의 모든 SF 영화가 구현한 디스토피아는 인류의 환경 파괴, 혹은 지나친 과학의 발전을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유랑지구’는 판에 박힌 문법에서 벗어나 지구에서의 생명의 탄생, 진화, 확산의 기원인 태양을 파멸의 원인으로 설정한다. 그건 곧 신의 쇠락, 신화의 재편으로 볼 수 있다.

중국의 신화는 제준과 희화가 결혼해 태양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그 때문에 지구가 황폐해지자 활의 신 후예가 9명을 제거하고 1명의 태양만 남겨놓음으로써 지구를 살기 좋은 환경으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준의 노여움을 산 건 당연지사. ‘유랑지구’는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듯하다.

▲ 영화 <유랑지구> 스틸 이미지

제준도, 희화도, 후예도 모두 사라진 미래. 마지막 태양마저 늙고 병들자 이제 신화도, 세계관도 재편될 때가 된 것이다. 여기에 슬며시 그리스 신화가 끼어든다. 17년 전 페이장은 출항을 앞두고 치에게 자신은 하늘로 날아가 별이 된다며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한다. 그리스 신화이자 ‘인터스텔라’다.

신과 사람이 공존하고 자주 교류한 고대 그리스에선 인간 중 영웅이나 고귀한 사람이 죽을 경우 별자리에 올라 신이 됐다. 오리온이 그랬듯. 이 영화에선 그 기준을 숭고한 희생으로 바꾼다. 치의 가족이 안전한 지하 도시로 갈 수 있었던 건 엄마의 희생 덕이었다. 치는 나중에야 그걸 깨닫는다.

즈앙은 치에게 “예전엔 태양에 관심이 없었고, 오직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며 인류의 욕심과 안일함 그리고 오만을 꼬집으며 그리스와 중국의 신화가 그런 인류에게 징벌을 내렸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연합정부가 선택한 프로젝트는 헬리오스다.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을 표제로 내세운 건 의미심장하다.

모든 재난 영화가 그렇듯 이 영화의 가장 큰 테제는 희망이고, 그 시작은 인류애며, 도착점은 집(가족)이다. 갈 곳을 잃은 주인공들은 방황에 지칠 무렵이면 으레 “밖은 위험해서 안 돼”, “집으로 가자”라고 토닥인다. 그에 대한 답이 “우리 집이 어딘데?”라는 허망일지라도 집은 돌아갈 유일한 희망이다.

▲ 영화 <유랑지구> 스틸 이미지

희망은 “집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의 근거인 “신이 보살펴줄 것”이란 믿음이 미망일지라도. 한편으론 ‘블레이드 러너’나 ‘A.I.’가 개입한다. 우주정거장에서 지구의 치를 돕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페이장이 인공지능 모스와 갈등하고 대립하는 시퀀스다.

단지 기표에 불과한 모스는 자신의 매뉴얼에 반발하는 페이장을 보고 “인간에게 이성적 사고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라고 비아냥거린다. 프로그램이 그 설립자를 깔보는 건 시스템이 인간을 지배하는 이 시대를 향한 경고다. 조지 오웰의 ‘1984’고, 영화 ‘이퀼리브리엄’(커트 위머 감독, 2002)이다.

영화의 이념은 다분히 생철학과 직관주의의 대표인 앙리 베르그송 색채가 짙다. 페이장이 모스와, 치가 왕레이와 각각 갈등하는 건 자신의 직관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그리고 우주를 유랑하는 지구라는 출발 자체가 베르그송의 ‘순수지속’에 근거한다. 당연히 ‘생’은 삼라만상과 세계의 근원이자 진리다.

취와 자호는 매력만큼 연기력도 훌륭하다. 제작진이 구현한 비주얼도 경탄할 만하다. 영화 말미에 지구가 다시 2500년의 유랑을 시작했다는 내레이션이 나온다. 2500년 전 즈음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탈레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25분. 12살. 4월 1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유진모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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