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각종 기록을 세우는 가운데 지난 23일 홍콩 코즈웨이베이의 한 극장 앞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나온 한 남성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군중에게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반전과 결말을 알리는 스포일러를 하자 성난 군중이 그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네오-다다이즘적 광풍과 광신이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피해자의 행위는 영화 팬으로서 매너 없는 짓이었지만 그렇다고 피를 볼 만큼 때린 가해자의 물리력 행사가 정당했다고 하기도 힘들다. 물론 하나의 세계관을 구성한 마블의 시리즈의 결론에 대한 궁금증은 충분히 이해는 된다.

하지만 국내에서 암표 값이 10만 원을 호가하는 등의 과열된 추종 열기는 신흥 종교의 광기 같은 공포감마저 준다. 영화는 콘서트와 달리 하루에 몇 회씩 길게는 몇 달간 상영되기에 암표를 사서라도 개봉일에 보겠다는 의지는 애정보다는 타자에 대한 과시와 더불어 영화에의 맹신이 엿보인다.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희망을 상실한 시대에 마블은 썩 괜찮은 위안, 재미, 안식처다. 하지만 컴퓨터 게임이 심심풀이나 잠시 쉬어가는 고속도로 휴게소 정도의 수준이어야 바람직한 것처럼 영화 역시 전문가가 아니라면 문화생활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게 올바를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향한 맹종에선 ‘국제시장’이나 ‘인천상륙작전’의 ‘국뽕’ 신드롬 같은 것, 혹은 ‘태극기부대’ 같은 대리만족형 카타르시스나 분노의 배출이 엿보이기도 한다. 상업영화와 학문의 우위를 가르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긴 하지만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허점이 있는 것만큼은 맞다.

흥행에 크게 성공한 영화는 대부분 학구적 깊이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경종을 올리는 메시지를 부각하기보다는 흥미를 앞세운다. ‘아이언맨’부터 ‘에벤져스: 엔드게임’까지 철학과 과학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양자역학이나 ‘존재와 시간’을 고찰하려 이를 티케팅 한 관객이 거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어벤져스’ 시리즈는 만화적 상상력이 창조한 우주관에 영화적 기술력이 구현한 눈부신 비주얼을 잘 버무린 판타지다. 그동안 떡밥 던지듯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의 솔로 무비를 개봉해온 마블이 그들보다 뛰어난 타노스를 세운 뒤 슈퍼히어로 총동원령을 내린 건 한탕 제대로 해먹기 위해서다.

만약 어벤져스 안에 타노스와 조금이라도 균형을 이룰 히어로가 있었다면 게임은 싱겁게 끝났을 것이다. 그러면 관객이 쇄도할 리 없다. 모든 드라마는 주인공이 수세에 몰리다가 천신만고 끝에 적을 물리치게끔 설계된다. 물론 허무주의적인 새드엔딩도 가끔 있긴 하지만 대부분 선택을 꺼린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사실 이전의 할리우드의 상업영화 문법에서 별로 새로울 게 없다. 깜짝 놀랄만한 엄청난 반전은 없고, 할리우드가 사골처럼 우려먹는 가족주의와 휴머니즘이 어깨동무를 한다. 이것만으론 심심한 걸 알기에 초능력을 지닌 히어로들에게 각각의 핸디캡과 트라우마를 덧씌운다.

어벤져스가 타노스를 물리치려는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부터 희생자들까지 살려내기 위해서다. 남다른 가족애를 통해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관객의 응원가를 유도한다. 또 모든 히어로를 한데 모아 장기자랑 대회를 엶으로써 대단한 스토리 없이도 아이돌 콘서트 같은 흥분을 안겨준다.

그게 전부다. ‘에번져스: 엔드게임’은 현대적 소비문화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상황이 어려운 사람이 갑자기 좋아질 가능성이 더욱 희미해지며,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어느 정도 타당한 균형을 맞출 희망이 오리무중인 암울한 시대의 일시적 도피처다.

세상에는 이루 셀 수 없는 ‘주의’와 ‘론’이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합리주의 철학을 열었고 심신이원론을 주창했다면, 스피노자는 범신론적 입장에서 일원론을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시종일관 역사적 유물론에 집착했지만,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라는 논리로 ‘신이 질서를 조정’한다며 자연법을 옹호했다.

▲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할리우드에서 깊은 철학을 찾는 게 쉽진 않지만 철학적 관점에선 타노스와 어벤져스 중 어느 한쪽의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타노스는 스스로 유일신이 돼 인구 과밀을 정리했다. 그의 철학적 ‘이즘’에 따르면 그게 합리주의다.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한 행위가 아니기에 용납될 수 있는 것.

그건 ‘왓치맨’의 오지만디아스가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 시퀀스가 던진 테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벤져스는 시간과 ‘신의 섭리’를 역행했다. 개체 수의 포화로 전 생명이 멸종될 위기를 막은 신의 예정조화, 결정론, 자연법 등을 제 가족을 되살리려 위반한 것이다.

최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는 스탠퍼드 감옥 실험의 조작 의혹을 방송했다. 조작이 맞는다면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일본에서 무차별 살상을 저지른 호크아이를 합류시킨 어벤져스 혹은 마블은 엄청난 오류를 범했다. ‘인간은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으니 용서하라’는 면죄부가 과연 옳을까?

아사할 것 같아 절도를 하고, 자기를 무시한 타인에 대한 분노 때문에 상해를 가했다면 정당한 것일까? “마블이 당장의 수익을 위해 저질 영화를 남발하고 있고, 장기적으로 전 세계 관객들의 안목을 해치게 될 것”이란 조디 포스터의 경고는 할리우드와 ‘절친’으로 변해가는 칸 ‘등’에 대한 쓴소리다.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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