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배심원들>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영화 ‘배심원들’(홍승완 감독)은 유무죄 여부와 진실을 파고드는 미스터리 형식이 여느 법정 영화와 다를 바 없지만 그 과정의 거듭된 반전이 꽤 흥미진진하고, 사회적 편견에 메스를 댄다는 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첫 국민참여재판이 벌어지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상으로 양손의 손가락을 잃고 노모, 여고생 딸 소라와 함께 어렵게 살던 중년의 두식이 기초수급자 자격을 따기 위해 친모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살해 도구로 쓰인 증거물 망치,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뜨리는 걸 본 목격자 경비원, 두식의 증언 등이 확보된 터라 양형만 남아있다.

법원장(권해효)은 이 재판에 처음으로 8명의 일반인 배심원을 세우는 배심원제를 채택해 전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담당 재판장인 준겸(문소리)과 함께 승진을 노린다. 법원 담당자의 파산 선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회생 신청을 하는 청년사업가 남우(박형식)가 8번째 배심원으로 선택된다.

나머지는 공대 졸업 후 삼수 만에 법대에 갓 입학한 그림(백수장), 10년간 남편 병수발을 해온 64살 요양보호사 춘옥(김미경), 무명배우 진식(윤경호), 중학생 딸을 둔 평범한 전업주부 상미(서정연), 대기업 비서실장 영재(조한철), 30년간 시신세정사로 일한 기백(김홍파), 20대 ‘취준생’ 수정(조수향)이다.

▲ 영화 <배심원들> 스틸 이미지

법조계의 긴장과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재판이 시작되고 법의학자는 피해자의 머리에 난 상처가 망치의 타격에 의한 것이라 증언하지만 기백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어필하는 바람에 쫓겨나고 휴정된다. 그런데 두식은 회생위원에게 자신의 특허품을 주는 걸 깜빡 잊고 왔다는 걸 깨닫는다.

경비원 몰래 대기실을 빠져나와 법원 건물을 헤매던 그는 길을 잃고 대기실에 감금된 두식과 마주 서고 긴장한다.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한 아줌마 청소부의 길 안내를 받아 배심원 대기실로 복귀한다. 속개된 재판에서 두식은 갑자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배심원들은 유죄와 무죄를 놓고 고민하는데.

시나리오까지 직접 쓴 홍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연출은 데뷔답지 않게 꽤 유려한 감각을 자랑한다. 특히 슬로 모션과 카메라의 360도 회전 등의 테크닉과 각 시퀀스에의 적절한 음악 채택은 세련됐다. 인트로의 포커스 아웃에서 포커스 인은 최초 배심원제를 대하는 사회적 센세이션을 표현하려는 의도.

영화가 집중하는 곳은 각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다. 법원장은 출세지향적인 인물이지만 그걸 위해 편법을 휘두르진 않고, 구태의연한 공무원의 의식을 지녔지만 때론 실험적이다. 준겸은 철저한 원칙주의자이지만 의외로 융통성을 발휘한다. 저마다 이기적이긴 하지만 악인이 없다는 건 성선설에 정초한다.

▲ 영화 <배심원들> 스틸 이미지

플롯의 중심에 선 남우는 파산 상태이지만 낙망하지 않고 긍정적이다. 또 생기 왕성한 태도를 보이며, 도전적인 정신으로 무장했다. 누가 봐도 엘리트고 그걸 숨기려 하지 않는 영재는 나중에 자신은 ‘노예에 불과하다’며 다른 배심원들과의 동질감을 드러낸다. 기백은 가진 게 없지만 소신이 매우 강하다.

수정은 내세울 게 하나도 없지만 ‘어른’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당당한 캐릭터다. 처음엔 가난한 수정에게 편견을 보이며 ‘꼰대’의 모습을 보였던 상미는 후에 딸에게 “엄마도 중요한 일이 있어”라고 자존감을 드러내며 엄마와 아내로 사는 주부들에게 자아 정립을 고무한다.

철저하게 이원론적인 영화다.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고 세상은 동전의 양면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라고 외친다. 젊은 판사들은 일중독인 준겸을 가리켜 “원래 비 법대 출신이 일은 죽도록 해”라고 속닥거린다. 준엄한 이미지의 판사들이 신변의 위협에 시달리며 의외로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것까지.

준겸은 남우에게 “법은 함부로 사람을 처벌하지 않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법의 정의를 가르친다. 그녀의 서류철에는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고 적혀있다. 남우가 “미로가 따로 없네”라고 법원 내부의 폐쇄성을 투덜대자 청소 아줌마는 “미로도 다 길”이라고 충고한다. 인식론적 명언이다.

▲ 영화 <배심원들> 스틸 이미지

소크라테스적인 남우가 이기적인 영재와 소피스트적인 준겸과 갈등을 겪는 구조로 시작해 영재가 남우의 공리주의에 굴복해 그 편에 서고, 준겸이 원칙이냐, 인식론이냐로 갈등하는 구조를 취한다. 준겸의 “첫 선고 때 3일에 걸쳐 판결문을 썼다”라는 고백은 법조계 일부의 소피스트적 성향의 고발이다.

판결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판사들이 신변의 위협에 시달린다는 건 전과자들의 복수심과 원망 등 그릇된 의식 때문이지만 일부 과하거나 심지어는 잘못된 판결도 있다는 얘기다. 준겸이 “처음이라 어렵죠?”라고 묻자 춘옥이 “처음이라 잘 하려고요”라고 대답하는 건 법 적용을 잘 하라는 뜻.

흔한 법정 드라마라고 선입견을 갖고 보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재미의 충격이 몰려올 것이고, 매우 진지할 것이라 지레 짐작하면 곳곳에 포진된 코미디 요소에 스트레스가 풀릴 것이다. 미스터리 장치는 끊임없는 두뇌의 활동을 유발해 감독과의 지적인 게임과 창작의 대결이라는 흥미까지 선사한다.

의심할 필요 없는 문소리는 외려 절제된 연기력으로 ‘연기파 배우’ 박형식의 탄생을 조력하고, 박형식은 이제 강약 조절이 어떤 건지 제대로 깨달은 듯한 노련함을 뽐낸다. ‘피고 입장에서 무죄 가능성을 생각하라’는 문구가 완성도에 마침표를 찍는 깔끔한 법정 영화의 탄생이다, 5월 15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저작권자 © 미디어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